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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차인 (有名 茶人) 1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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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차인연합회 작성일09-07-08 00:23 조회9,42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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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 차인 有名 茶人]
각안 覺岸- 1820-1896 아호-梵海 . 완호 윤우의 법맥을 이은 호의 始悟(1778-1868)의
 법제자 東師列傳, 茶藥說, 茶歌를 남긴 학승이며 차인
 차약설-1852년(33세)가을 이질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 차를 마시고 병이 낳은기록
 차가- 보림사의 작설차(보림금설寶林禽舌), 지리산 화개동 칠불선원의 차(花開珍
 品), 함평과 무안에서 나는 토산차(咸務土産), 강진과 해남에서 만든차(康海製作)
 무등산에서 나는 일창일기차(瑞石槍旗), 백양사의 작설차(白羊舌嘴), 덕룡산 불회
 사의 용단차(德龍龍團), 월출산 백운동에서 나는차(月出出來) 등 10곳의 차산지를
 구체적으로 꼽았다. 여기에 대둔사 승려의 이름 10 여명이 보여- 중부(中孚. 艸衣)
리봉, 무위, 예암, 남파, 영호, 제산, 언질, 성학, 태연 등
 각안의 문집에 초의차시에 초의가 만든 차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 초의차가 떡차
 임과 찻나무틀에 넣어 여러모양으로 만들었으며 대나무 껍질을 이용해 포장하고
 보관한 낸용을 볼 수 있다.
강백년 姜栢年- 1603-1681 호 雪峰. 좌참찬을 지낸 청백리 차인.
지재당 강씨 只在堂 姜氏- 호 只在. 賈島의 시 '只在此山中'에서 두 글자씩 제호
 고종 때 김해 기생, 此山 배문전의 소실이 된 시인. '지재당고'에 시 100여 수
 구양수 歐陽脩- 호는 醉翁, 六一居士. 中國 宋나라 때 문인. 唐宋八大家의 한사람
 최초의 시화집 '六一詩話', 저서'歐陽文忠公集'
경덕왕 景德王 742~765 삼월 삼짇날 귀정문 누상에서 茶會를 베풀었다.
권상하 權尙夏- 1641-1721 호 遂菴. 송시열의 수제자, 출사하지 않음.
경봉선사 鏡峰禪師- 1892밀양 출생-91세 양산 통도사 극락암에서 입적.
13세에 한학을 공부, 15세 어머니 별세하자 16세 통도사(자장율사 창건)에 출가
62세 극락암 선원 조실로 추대됨. 스님의 가풍은 참선과 불학, 염불, 기도, 다도
 등 불가의 모든 방편이 한데 어우러진 참으로 깊고도 넓은 화엄의 바다였다.
한국의 근 현대 고승인 혜월, 만공, 용성, 만해, 현암, 제산, 효봉, 동산, 향곡, 전강,
청담, 일타 스님 등과 격외의 편지를 왕래 했는데 그 기록들은 소중한 자료로 남아
 있다. 성철 스님이 흐트러진 禪風을 진작시킨 분이라면 경봉선사는 중생교화에
 진력하신 분이다. 그의 차시 '하늘에 가득한 비바람 허공에 흩어지니/ 달은 천강의
 물 위에 어려 있고/ 산은 높고 낮아 허공에 꽂혔는데/ 차 달이고 향 사르는 곳에 옛
 길이 통했네'
경봉정석 鏡峰靖錫- 1892-1982 속명 金鏞國, 호 경봉.
어려서 한문 공부, 16세 통도사로 출가, 20세 구족계를 받고 전국을 두루 다님.
1935년에 통도사 주지가됨. 시와 글씨에 능해 작품을 남긴 다승이다.
 '계수나무 짙은 향기 달빛 따라 피어나고/ 흰구름 떠 흐르는 물가에 멍청히 앉았
 다네/ 겹겹이 싸인 산과 골 사람 자취 없는 곳에/ 손을 만나면 차권하며 맑은
 바다 가르치네
 경암응윤 鏡巖應允- 1743-1804 속성 민씨, 법호 경암, 15세 출가. 여러 선승의 지도
  를받고 정진하여 대종사가 됨. 저서 '경암집'
고유섭 高裕燮 - 1905~1944 호 又玄. 인천 출생. 미술사학자. 일제 강점기 국내에서
  미술사와 미학을 공부한 학자로 우리 미술을 처음으로 학문화한 학자이다.
 개성부립박물관장 역임, 백제와 신라 때의 석탑을 양식론에 입각 체계화 하였다.
 그의 업적을 기려 又玄賞이 제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곽여(郭與 1058~1130 자는 몽득, 시호는 진정) 문인, 예종을 싲좌할 때 임금이 내린
  쌍용각 차를 하사받고 시를 지었다.
권한공(權漢功 ?~1349) 호는 일재一齋, 차시 寒松亭이 남아 전한다.
금명보정 錦溟寶鼎- 1861-1930 성 김씨, 호 금명, 자 茶松,
유가의 적손이었으나 가난으로 15세 송광사로 출가, 여러 큰 스님들에게 배움.
송광사 주지도 지냄. 저서 '다송시고' 등 , 전하는 차시가 70편을 넘는다. 일제하의
 어두운 때의 것도 많아서 조선의 차문화가 줄기차게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茶松銘> '솔잎 한 바랑에 차 한 병으로/ 온갖 인연 끊고 절집에 누웠다네/ 결사하여
 수행한 옛사람들 우스우니 / 새 지저귀고 꽃핀 것 무슨 방해되리'
 '달 지면 촛불 밝히고/ 나무 쪼개어 차 달이네'
금원당 김씨 錦園堂 金氏- 1804- ? 김덕희의 소실, 經史와 시문에 능함.
여인으로 태어남을 한탄 1830년 남장하고 금강산을 유람
 그의 별장 三湖亭에서 운초, 瓊山, 竹西, 瓊春 등의 여류 시인들과 시를 읊으며 보냄
'湖東西洛記'를 남겼는데 30여 편의 詩가 있다.
기대승 奇大升- 1527(중종22) 광주 송현동 출생-1572(선조5). 호 高峰
1558(명종13) 대과 1등 급제, 32세에 성균관 대사성 퇴계(58세)를 찾아간다. 이후
 장장 8년간 四端七情(본성 仁, 義, 禮, 智/ 감정 喜, 怒, 哀, 樂, 愛, 惡, 欲) 논쟁을
 벌인다. 幽居雜詠 15수 중에 詩한수 '해가린 소나무는 장막 같고/ 마루에 이른 대나
 무는 발과 같네/ 벽에는 서자徐子의 자리를 달았고/ 꽃은 적선(謫仙:이백)의 처마에
 춤추네/ 학을 길들이는 사이 세월이 흐르고/ 차 달이며 시냇물을 더하네/ 사립문 온
 종일 닫고 앉아/ 홀로 봉의 부리 뾰족함을 감상하네' 유적지 장성 월봉서원
길재 吉再 - 호는 야은. 이색, 정몽주와 더불어 고려 三隱으로 불리는 차인들이다.
김간 金幹- 1646-1732 호 厚齋. 우참찬.
김득신 金得臣- 1604-1684 자 子公, 호 栢谷. 진주목사 金時敏의 손자. 시인
 급제하여 안풍군에 봉해졌으나 뒤에 화적들에게 살해됨.
김대렴 金大廉- 생몰년 미상. 삼국사기에 흥덕왕 3년(828년)에 사신 大廉이 중국(唐)
 에서 차의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는 기록. 재배지는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쌍계사라 전해짐.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으나 , 이때부터 번성하게 되었다
 고 한다.
김극기 金克己- 1148~1209 호는 노봉, 그의 시 중에 차가 자주 등장한다.
김만기 金萬基- 1633-1687 자 永淑, 호 瑞石. 숙종의 장인, 증조부는 사계 장생.
조부는 참판 槃, 아버지 益兼(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자폭). 송시열의 문인.
딸이 仁敬王后로 國舅로 光城府院君에 봉해져, 대제학. 伯父 益熙가 이름난 차인.
김만중 金萬重- 1637-1692 자 重叔, 호 西浦. 익겸의 유복자, 萬基의 아우.
삼남의 어사를 지냄. 공조판서, 대사헌 지냄.정쟁으로 유배와 등용 반복.
남해에 유배 때 어머니를 위해 '九雲夢'을 쓰고 배소에서 병사 했다. '謝氏南征記'
김상용 金尙容- 1561-1637 자 景擇, 호 仙源, 成渾의 문인
 과거에 급제 벼슬길,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우고, 明에 성절사로 다녀와 형조판서
 지냄-우의정, 병자호란 때 왕족을 호종해 강화로 갔다가, 함락되자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김익겸과 더불어 자폭. 글씨를 잘 썼고, 시조 몇 편이 남아 있다.
이집안의 다풍은 대대로 전승되어 4대 창흡 형제들에게 와서 크게 꽃핀다.
 <至月雪水煎茶> 산 동자 눈 맞으며 샘물 새로 길어서/ 돌솥에 활화로 용단을
 다리네/ 솔소리 내며 향기 피어 뜰에 가득하고/ 한 사발의 산뜻한 풍취가 신선
 되어 오르는 듯.
김상헌 金尙憲- 1570-1652 자 叔度, 호 淸陰, 尹根壽의 문인, 상용의 아우.
과거에 급제 서인으로 도승지, 대사간, 대제학, 이조. 예조 판서를 지낸 척화파로
 청에 두번이나 잡혀갔다가 돌아왔다. -영의정 역임, 친명파로 글씨를 잘 쓴 차인.
 '늙어서 글은 쓰지 않으면서/ 술잔과 찻잔만은 옆에 두며 웃는다네'
김서 - 고려의 무관으로 1271년 세자 충열왕이 원나라에 볼모로 갈때  호부낭중으
 로 시종했다. 그의 차시가 있다.
김수항 金壽恒- 1629-1689 자 久之, 호 文谷, 수흥의 아우.
服喪문제로 남인 윤선도를 귀양가게한 서인. 좌의정, 청나라 다녀옴. 경신대출척
 으로 영의정이 되었다가 己巳換局으로 진도에 유배되어 사사됨.
전서를 잘 쓴 차인으로 집안 대대로 다풍을 이어받음.
김수흥 金壽興- 1626-1690 자 起지, 호 退憂堂, 상헌의 손자.
서인, 벼슬은 영의정, 기사환국 때 장기에 유배 되었다 다음해 죽음.
 '한가로운 구름과 날아드는 새는 같은 취향이고/ 조촐한 식사에 좋지 않은 차로
 편하게 지낸다네'
김시습 金時習- 1435-1493 호 五歲, 梅月堂, 설잠雪岑(非僧非俗), 生六臣의 한사람
 성균관 부근에서 출생, 세살 때 시를 짓고, 다섯 살에 세종에게 불려가 전지를 받음
13세 까지 대사성 김반 등 스승들에게 사서삼경 등을 배운다. 15세에 어머니가 죽자
3년 시묘살이를 한후, 훈련원도정 남효례의 딸과 혼인, 삼각산 중흥사에서 학문에
 힘쓰다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보고 책을 모조리 불태우고 설악산 오세암으로 출가
 역마살 만행하다 책을 구하러 서울에 갔다가 효령대군의 간곡한 권유로 내불당에서
 불경언해를 돕다 현실에 절망 31세 경주 금오산으로 들어가 매월당을 짓고 7년을
 은거한다. 거기서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와 시편을 모은 '유금오록'을 남김.
그후 서울로와 10여년 보내다 47세에 안씨를 맞아들여 환속 한다. 2년 만에 '폐비윤
 씨' 사건이 나자 다시 방랑길- 마지막 찾아든 곳 충청도 공주 무량사에서 생을 마감.
 茶詩 <養茶> "해마다 차나무 새 가지 자라는 데/ 그늘에 키우느라 울을 엮어 보호
 하여 / 육우의<다경>에는 색과 맛을 논했는데/ 관가에서는 창기만을 취한다네/
 봄바람 불기전에 싹이 먼저 피고/ 곡우 돌아오면 잎이 반쯤 피어나네/ 조용하고
 따뜻한 작은 동산을 좋아하니/ 비에 옥 같은 꽃 드리워도 무방하리니"
 <茶詩> 솔바람 불어오니 차끓이는 연기/ 팔락팔락 가로 비껴 물가에 떨어지네/
동창에 달 떠도 잠 못 이루고/ 병 들고 가서 찬 샘에 물 긷네/ 날 적부터 티끌세상
 싫은 걸 스스로 괴이쩍게 여겨/ 입문하여 봉鳳자 쓴 게 벌써 청춘 다 지나갔네/
 차 끓이는 누른 잎새 그대는 아는가/ 시 쓰다 숨어 삶이 누설될까 두렵네.
 그의 저서인 매월당집에 60여수나 되는 차시가 전한다.
김육 金堉 1580-1658 본관 청풍, 자는 백후伯厚, 호는 潛谷, 선조 38년(1605) 사마시에
 합격 성균관에, 대동법 시행을 주장한 실학자이자 개혁정치가, 기묘사화 때 조광조
 와 함께 사화를 당한 대사성 김식의 3대손이자 대쪽 같았던 참봉 金興宇의 아들이
 다. 水車를 만들고, 화폐를 유통시키고, 수레를 제조, 時憲曆을 제정, 지식을 집대성
 한 백과사전인 유원총보類苑叢寶를 편찬하였다. 여기에 茶편이 있는데 다경의 육우,
차의 효능, 차의 일화 차세茶稅에 얽힌 얘기 등 총 1730여자로 기록돼 초의보다 2백
 여년 전에 차를 소개해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정보를 주고있다. 이목의 茶賦와 초의
 선사의 동다송이 차를 개인의 정서에 접목시킨 문학적인 다서라면 김육의 차에관한
 다양한 지식은 사전을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가평 잠곡에 晦靜堂을 짓고 은거,
익산 함라면에 불망비가 있다.
김이안 金履安- 1755-1845 호 三山齋. 판서, 지중추부사
 김익희 金益熙- 1610-1656 자 仲文, 호 創注. 沙溪 長生의 손자.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했고, 대사성, 이조판서를 지낸 차인.
김장생 金長生- 1548(명종3)한양출생- 10대에는 송익필로부터 사서와 근사록을 배웠
 고 20세쯤에 대사헌을 지낸 아버지계휘의 권유로 이이의 문하로 들어간다. 이후
 창릉참봉을 지내다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를 다녀온 뒤 정산현감, 다음해 임진왜란
 때는 호조정랑이 되어 명나라 원군의 식량조달을 담당, 전란이 끝난 뒤 유성룡의
 천거로 宗親府典簿가 되고, 2년 후 1602(선조35) 익산군수로 나갔다가 북인이 득세
 하자 사직하고 연산으로 내려간다. 정묘호란 때는 80노구를 이끌고 兩湖號召使를
 맡아 의병을모으고 흉흉한 민심을 수습했다. 후에 형조참판 한달만에 낙향하여
 예학 정립과 제자 양성에 전념한다. 호 沙溪. 학자였지만 서인의 영수격,
저서: 상례비요, 가례집람, 전례문답, 의례문해 등 거의 예학에 관한 것, 그가 제자
 를 양성한 연산 돈암서원은 우리나라 3대 서원 중 하나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보존되었던 곳이다. 대표 제자로는 우암 송시열. 가례집람에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지내는 삭망 차례 때 신주 오른쪽에는 술잔을, 왼쪽에는 찻잔을 놓는다고 해서 茶禮
인 것이다. 또한 예는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성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祭器圖에는 찻잔과 차선, 茶托, 茶碗 등 다구들이 구체적으로 나와 차에 대한 지식
 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김정희 金正喜- 1786(정조10)-1856(철종7). 호는 阮堂, 秋史, 禮堂, 詩庵, 老果, 農丈人,
 天竺古先生, 勝雪, 苦茶老人,覃齋, 茶門, 一爐香室 등 백여개, 벼슬 이조참판.
 본관은 慶州, 자는 元春, 1819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름.
 서화에 뛰어나 拙撲淸高한 秋史體를 대성. 저서 阮堂集, 金石過眼錄, 覃연齋詩稿 등
 병조판서 金魯敬의 장남으로 태어나 백부인 金魯永의 양자가 된다. 아우 命喜도
 차인. 24세 때 동지부사인 아버지 따라 연경에 갔다가 청의 巨儒 翁方綱과 阮元을
 만나 고증학에 눈을 떴으며, 조선 金石學의 태두가 된다.(신위, 권돈인, 전기 등)
 그는 실학을 주장, 경학, 문자학, 사학, 금석학에 심취해 秋史體를 창안했다.
 1819(순조 19) 문과에 급제, 암행어사를 시작으로 벼슬길. 부친 노경이 윤상도의
 옥사에 배후조종을 한 혐의로 추사는 고금도로 유배 갔다 순조의 배려로 해배 되어
 판의금부사로 복귀, 이후 병조참판, 성균관대사성 등 역임하다 헌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윤상도 사건이 재론되어 1840(헌종6)-1848(헌종14) 까지 9년간 제주도에서
 유배생활. 유배길에 일지암에가서 하룻밤- 초의는 덖은 차를 품고 제주도에 세번이
 나 다녀온다-
 또한 역관 李尙迪이 헌신적으로 도왔다. 그에게 유명한 歲寒圖를 그려준다.
 1851(철종2) 영의정 權敦仁의 사건에 연루되어 안동 김씨의 견제를 받아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2년간 유배. 돌아와 부친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한다.
 유적지- 예산 추사고택, 봉은사 편액 [板殿] 글씨는 古拙美 넘치는 죽기 3일전
 쓴 것. 실사구시를 학문의 바탕으로 삼은 그는 저서로 완당집, 금석과안록, 담연재
 시고 등이 있다.
김종직 金宗直- 1431~1492 호 점畢齋, 조선의 성리학자.도학의 정맥을 이은
  사림파의 宗祖로 불린다. 성종 2년(1471) 봄에 함양군수로 부임했는데 당시 공물
  로 바칠 차가 없어 백성을 위해 다원을 조성해 官營 차밭을 만들었다..
  '신령차 받들어 임금님 장수코자 하는데/ 신라 때부터 전해지는 씨앗을 찾지
  못하다/ 이제야 두류산(지리산) 아래서 구하게 되었으니/ 우리 백성 조금은 편케
  되어 기쁘네'
김지대 金之岱 - 고려시대 무신으로 淸道金氏의 시조
이다.
김창집 金昌集 형제들- 1648-1722 영의정, 辛壬士禍 때 사사. 金壽恒의 맏아들.
김창협 金昌協- 1651-1708 자 仲和, 호 農巖. 三洲. 李端相의 사위
 이조정랑, 교리, 대사간, 영풍부사. 문학과 유학에 깊었다. 기사환국 때 영평에 은거.
 '오늘 어이하여 이렇게 평온한가/ 술은 없으나 차가 있어 한 모금 마시고 책을 읽으
 니/ 모든 사기로움 없어지네/ 어저께 바람 심하더니/ 오늘 아침 맑고 깨끗해졌네'
김창흡 金昌翕- 1653-1722 자 子益, 호 三淵. 李端相에게 배움. 기사환국 때 은거.
이황과 이이의 절충설을 주장함. 수많은 차시 남김.
 '술은 연꽃 핀 정자가 좋고/ 차솥은 대숲 속에 건다네/ 아득한 아포에 비 내리고/
내 마음 하늘가에 있다네'- 白月四時詞
김창업 金昌業- 1658-1721 자 大有, 호 老稼齋. 그림 잘그려 산수, 인물 남김.
1712년 큰형 따라 중국에 다녀와 '연행일기'를 통해 산천, 사관, 서적 등을 기록함.
 '동산에는 구르는 듯 새 지저귀는데/ 발 밖엔 어지럽게 떨어지는 꽃이라네/
뜰 가득한 소나무 그늘엔 손 하나 없고/ 맑은 샘 길어 홀로 우전차 달인다네'
김춘택 金春澤- 1670-1717 자 백우, 호 북헌.
서인 집안, 당쟁으로 여러번 귀양살이.종조부 만중의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한역
 길재 吉再-1353-1419 해평 길씨, 호 冶隱, 金烏山人, 자 再父, 11세 도리사에서 글 배워
18세 박분에게 논어, 맹자 익히고 , 아버지를 따라 개경에서 이색, 정몽주, 권근의 문
 하에 들어가 학문의 깊이를 더한다. 1374(공민왕 24) 생원시, 1383(우왕 9) 사마감시
 에 합격, 2년 후 진사시에 급제하여 청주목사록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한마
 을에 살던 이방원(조선 태조)과 교분이 두터워진다. 이후 成均學正, 成均博士.
창왕 1년(1389) 門下注書가 되었으나 고려의 국운이 다한 것을 알고 이듬해 고향
 선산으로 낙향. 1400(정종 2) 나라가 바뀌어 방원이 그를 불러 太常博士에 임명하
 였으나 두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소를 올려 거절한다. 31세 고향 금산에서 혼인,
三隱이 모두 차인 이었다. 유적지는 금산(옛 금주) 淸風書院과 태어난 선산
 산문 <山家序> "회오리바람 일지 않으니, 비좁은 방도 편안하고/ 밝은 달이 뜰에
 다가오니, 홀로 느리게 거닌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면, 이따금 베개를 높여 꿈을
 꾸고/ 산에 눈이 펄펄 흩날릴 땐, 차 달여 혼자 마신다"
나옹화상 儺翁和尙 - 1320-1376 법명 惠勤, 호 나옹, 속성 아牙씨, 초명 元慧
  영해부(경북 영덕군 창수면 갈천리) 사람, 거처하던방 江月軒 고려 승려
  21세 때 친구의 죽음을 보고 무상을 느껴 사불산 묘적암의 요연선사를 찾아가
  출가- 25세 때 회암사에서 수도 4년만에 대오한다- 중국 연경 법원사로가 인도승
  指空에게 인가받음.-다시 임제의 법맥을 이은 자선사의 處林을 만남.
  1371년 王師가 되고 여주 신륵사에서 죽었다.
  <차시> "본래 天然으로 조작된 것 아니니/ 어찌 밤을 향해 玄旨를 구할 것인가/
  다만 一念으로 마음에 일 없으니/ 목 마르면 차 달이고 곤하면 잠을 자리.
 <토굴가>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남용익 南龍翼- 학자, 자 운경, 호 호곡.
  일본 통신사의 종사관으로 다녀와 '扶桑錄'을 쓰고 그속에 당시의 일본 차풍속을
 소개함. 양관 대제학, 이조판서 역임. 기사환국 때 명천으로 유배돼-거기서 죽음.
 문장과 글씨에 능한 차인.
 '눈녹여 차 달이는 흥취/ 북쪽산 찾은 나그네 마음이라네/ 우연히 선비 모임 이루
 어져/ 서로 꽃다운 얘기 토한다네'
노동 盧仝- 자호 玉川子. 中 唐나라의 범양 사람. 차품평을 잘함. 차를 예찬한 '茶歌'
 유명. 小室山에 은거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韓愈를 존경하였다.
대각 大覺 - 고려 천태종의 시조. 이름은 후煦 자는 義天 대각은 시호이다.
  그의 시에 "이슬 함초롬히 내린 봄 아침이나 달이 밝은 밤이 차마시기 좋은 때".
도안 (道安 1582~1655) 조선의 승려, 호는 월저月渚, 화엄대종사, 又次八韻이 전한다
도잠 陶潛- 중국 진晉나라 때의 시인. 자는 淵明, 호는 오류선생五柳先生.
 저서 도연명집. 팽택령彭澤令이 되었다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남기고 귀향하였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가 많다.
두보 杜甫- 자호 杜陵布衣. 中 唐. 詩聖. 문집 杜工部集
만해용운 卍海龍雲- 1879-1944 속명 韓유天, 호 용운, 별호 만해. 시인, 소설가, 독립운
 동가.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고 동학혁명에 가담했다 실패. 17세 오세암에 출가함.
 백담사, 유점사 등에서 계를 받고, 일본에 다녀옴. 후일 일본이 우리 불교를 조동
 종에 복속시키려 하자 저지에 힘쓰며, 종교지 '惟心' 간행. 중국에 가선 독립군관
 학교를 방문하고, 시베리아를 거쳐 돌아옴, 3.1운동 때는 불교대표로 33인으로
 활동하고,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를 썼다. 신간회에도 참여하고, 시집 '님의
 침묵'을 출간함. 1933년 남향이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되므로 북향집 심우장을
 지었다고함.
모로오카 다모쓰 諸岡存- 1879~1946 일본인 정신과 의사, 저술가, 일본차 연구의
 선구자로 차의 약효와 茶經 연구에 뛰어난 업적을 남김. 규슈대학에서 교편을 잡
 기도 하였다.저서로 茶經評繹, 朝鮮의 茶와禪
목대흠 睦大欽- 1575-1638 문신, 자 湯卿, 호 茶山, 竹塢.
 참판 첨의 아들, 서흠 장흠의 동생. 광주목사로 있다 광해군 때 낙향. 이조 때에 조참
 의, 강릉부사 역임. 시문에 뛰어남.
 '사양 많이 해도 주인은 손에게 권해/ 함께 찻잔 들고 봄 품경 감상하네'
무경자수 無竟子秀- 1664-1737 속성 홍씨, 법호 무경, 운문사 추계유문의 법을 이믕.
 차인으로 '무경집' '불조선격'을 남김
무염 無染 801~888 속성은 김씨 시호는 大郞慧和尙  태종무열왕의 8대손
문무왕 文武王 661~680 신라 30대왕. 가락국의 시조 수로 왕릉에 차로써 제사를  지
 내게 했던 태종무열왕의 맏아들. 끊어졌던 이 제사법을 아버지 뜻을 기리어 이어갔다
묵암최눌 默庵最訥- 1717-1790 속성 박씨, 법호 묵암, 14세 출가. 풍암, 용담, 상월 등
 에게 배움. 화엄학에 깊었다. 저서 '묵암집' '화엄과도' 등
미시나 쇼에이 三品彰英- 1902~1971. 일본 사기현 출신 역사학자, 신화학자.
 교토京都제국대학 졸업, 해군교수, 도시샤同志社대학 교수. 오사카大阪시립박물관장
 역임. 한국고대사를 연구 新羅花郞의 硏究 三國遺事考証 등의 저술 남김.
민우수 閔遇洙- 자 士元, 호 蟾村, 貞菴. 大司諫 鎭厚의 아들
 김창협의 문인, 음보로 관직에 올라 대사헌 지냄.
죽서당 박씨 竹西堂 朴氏- 호 半啞堂. 朴種彦의 서녀, 후에 徐箕輔의 소실이 됨
 일생 병치레, 경사와 시문을 탐독 한유와 소식의 풍을 따름. '죽서집'에 시 180여 수
 박세채 朴世采- 1631-1695 호 玄石. 소론의 영수, 좌의정. 예학에 밝음.
박영희 朴映熙- 호 應松. 저서 '동다정통고'
박장원 朴長遠- 1612-1671 문신, 자 중구, 호 구당.
 강원관찰사, 이조, 공조, 예조 등의 판서를 역임. 개성유수로 재직 중 죽음.
 <樓上吟>'영주루에서 꿩들 바삐 나는 것 보고/ 날마다 올라 넘어가는 해 보낸다네/
 금정물 길어 달인 차 벌써 잔이 식고/ 옥서 펼친 곳에 차 연기 피고 비 펄펄 날리네'
박지원 朴趾源- 1737-1805 실학자, 소설가. 자 仲美, 호 燕巖.
 妻叔 李君文에게 수학하고, 30세에 홍대용에게 신학문을 배움
 1790년 進賀使 朴明源을 따라 청에 다녀옴. 선공감감역, 의금부도사, 안의현감,
 양양부사. 홍대용, 박제가와 함께 북학파의 영수로, 청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
 고 주장. 소설: '熱河日記' '許生傳' '虎叱' 등
박종화 朴鍾和- 1901~1981. 호는 월탄月灘. 시인, 소설가, 비평가. 휘문의숙을 졸업
 백조白潮 동인으로 활동. 성균관대 교수. 서울시예술위원회 위원장, 한국문학가협회
 초대 회장, 예술원 회장 등을 역임. 주요작품-흑방비곡黑房秘曲. 금삼의 피 등
박충좌 朴忠佐(1287~1349) 자는 子華 호는 恥庵 고려 때 학자
백곡처능 白谷處能- 1617-1680 법호 백곡, 속성 김씨, 유학을 공부 해 문장을 잘씀.
백문절 白文節 ?~1282 자는 빈연彬然 고려 때 문인으로 문장에 뛰어났다.
벽암각성에게서 법을 배우고, 팔도선교도총섭을 지냄, 대흥사에 오래 주석함,
억불정책에 부당함을 주장함. 차시 몇편이 있다.
 '봄 강가에 어린 풀 곱게 돋고/ 저무는 모래벌판엔 옅은 연기 피네/ 어느 때쯤 우리
 도반들과 손잡고/ 햇차 달여 서로 권하며 마시리'
백암성총 栢庵性聰- 1631-1700 법호는 백암, 속성 이씨, 16세 출가, 취미수초에게 법을
 받음, 임자도에 표류해 온 불전들을 얻어 많은 불서를 간행함.
백파 白坡- 1767(영조43)-1852(철종3). 12세 선운사에서 출가. 이긍선 백파는 法號
범해각안 梵海覺岸- 1820-1896 성 최씨, 법호 범해, 완도 청해 출신, 14세 대흥사로
 출가. 호의시오의 법을 이었고, 초의에게서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고 다맥을 이음.
 차시 20여편 남김. <茶具銘> '내 생애 맑고 한가로워 몇 말 찻잎을 만들었네/ 헐어진
 화로 걸어놓고 약하고 강한 불 담았다네/ 질 다관은 오른 쪽, 자기 다완 왼쪽에
 두고/ 오직 차에만 힘쓰니 무엇이 나를 유혹하리'
변중랑 卞仲朗 ?~1398 호는 春堂 변계량의 형
보우 普雨- 1515-1565 호는 虛應堂, 懶庵 조선 중기 봉은사 주지, 선종과 교종 부활
 시키는 등 부흥시킴. 15세 금강산 마하연사로 출가 6년 정진 깨달음 얻고 화엄경 등
 모든 대장경을 섭렵, 이후 주역까지 통달 유학자들과 널리 교유한다.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대비의 신임으로, 없어진 승과제도를 부활시켜 서산대사
 (청허 휴정선사)와 사명당(유정선사) 등 걸출한 고승이 나왔다.
 400여건이 넘는 상소문에 물러나 있다 문정대비가 죽자 체포되어 제주도로 귀양을
 가 며칠만에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죽임을 당함.
 차시 "그 누가 나처럼 이 우주를 소요하리/ 마음 따라 발길 마음대로 노니는데/
 돌평상에 앉고 누워 옷깃 차갑고/ 꽃핀 언덕 돌아오면 지팡이 향기롭네/ 바둑판 위
 한가한 세월은 알고 있지만/ 인간사 흥망성쇠 내 어찌 알리/ 조촐하게 공양을 마친
 뒤에/ 한줄기 차 달이는 연기 석양을 물들이네."
보우선사 普愚禪師- 1301-1382 , 홍주 출생, 법명 普虛, 호 太古, 시호 圓證國師
 太古寺 창건, 13세 출가 양주군 회암사에서 광지화상에게 불법 배우고 가지산 보림
 사에서 도를 닦음, 1325(충숙왕12) 승과에 급제했으나 나아가지 않고 용문산 상원암
 과 개성의 감로사에서 고행 33세 때 첫 깨달음 얻고, 38세 無 자 화두로 오도송 터뜨
 림, 삼각산 중흥사 주지로 주석한 뒤, 중흥사 동쪽에 태고암을 짓고 5년간 정진한다.
 46세 중국으로 건너가 석옥 청공을 만나 보름 만에 인가를 받는다. 48세 귀국 용문산
 에 소설암을 짓고 정진하던 중 56세 공민왕의 부름을 받아 봉은사에 주석하면서
 왕사로 책봉된다. 그후 16년만에 국사로 책봉되고, 12년 후인 82세에 용문산 소설암
 에서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열반. <열반송> 사람의 목숨은 물거품머럼 빈 것이서/
 팔십여 년이 봄날 꿈속 같았 네/ 죽음에 다다라 이제 가죽포대 버리노니/ 둥글고
 붉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네. <그의 차시 중> ...늠름한 추위는 뼈에서 생기고/
소소한 눈발은 창을 두드리는데/ 깊은 밤 질화로에/ 달이는 차향기가 다관을 새어
 나오네. '太古庵歌' 19수도 있다.
보조국사- 普照 본명 정지눌鄭知訥 1158-1210 길상사(송광사) 1세 社主, 자호
 牧牛子, 시호 佛日普照 헌안 왕으로부터  차를 하사받음. 8세 때 사굴산파의 종휘
 스님에게 나아가 승려가됨, 명종 12년(1182) 25세 승과에 급제. 광양 상백운암.
보천 寶川 효명 孝明 -600년대 神文王(681~692)의 두 아들 삼국유사에 매일 차를
  달여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함. 보천은 보질도 태자이며 지장법사와 동일인 설..
부용당 金雲楚- 당호 芙蓉, 자 雲楚, 이름 미상. 金履陽을 흠모- 소실
  성천의 기생으로 시재가 뛰어나 '운초시집'에 200여 편의 시가 있다.
부휴 (浮休 1543~1615) 조선 중기의 고승. 속명 金善修 임진왜란 때 승병장. 산거잡영
  奇松雲 등이 있다.
사마천 司馬遷- 자는 子長. 중국 전한 때의 역사가. 부친 司馬談을 이어 史記를 완성
사명대사 四溟大師- 1544(중종39)-1610(광해군 2년) 법명 惟政, 당호 四溟, 松運
15세 어머니, 16세 아버지를 잃고 직지사로 출가, 2년만에 승과에 합격한 뒤 30세에
 직지사 주지가 된다. 이후 묘향산으로 들어가 서산대사(휴정)의 제자로 3년간 정진,
43세 때 옥천 상동암에서 소나기에 떨어진 꽃을 보고 무상의 도리를 깨달아-
49세 임진왜란 맞아 재약사(표충사)에서 의병장으로  의병들을 모아 서산대사의 휘하
 로 들어간다.
50세 명군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 벼슬이 堂上職에 오른다.
51세 1594(선조 27년) 울산 서생포에 있던 加藤淸正을 만나 적정을 탐지한다.
62세 1604(선조 37년) 대마도를 거쳐 왜의 본토로 들어가 德泉家康을 만나 화친을
 맺는다. 동포 3천여명과 귀국하자 선조는 가의대부 품계를 내린다.
1607(선조40년) 치악산으로 들어가 병을 치료하지만 더 깊어져 합천 해인사로 내려
 가 요양하던 중 1610(광해군 2년)에 홍제암에서 입적함. 다수의 차시 등을 남겼다.
 밀양은 사명대사의 고향이자 茶의 고장이다. 茶竹里, 茶院洞, 茶村, 사명대사의 생
 가터 이웃마을 茶禮里 등 차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그가남긴 차시 한 편 -
 '조계(혜능)를 이어 나온 먼 손(孫)/ 행장 이르는 곳마다 사슴과 벗을 삼네/ 사람
 들아 헛되이 날을 보낸다 하지 마오/ 차 달이는 틈에 흰구름 본다네'
사포 蛇包 - 617~686 원효대사와 함께 수행한 道伴으로 차를 다려 드렸다고 함.
서광계 徐光啓- 1562-1633 호-현호玄扈 農政全書 저술
  대그릇에 차를 간수하는 법을 적어둠
 서거정 徐居正- 1420(세종2)-1488(성종19) 호 四佳亭. 23년간 문형을 지냄
   저서 東人詩話, 태평한화골계전, 사가집 등
서경덕 徐敬德 - 1489~1546 호는 花潭 조선의 철학자 성리학의 대가로 술과 차를
  즐겼다고한다. 박연폭포, 황진이와 더불어 松都三絶로 불림.
 서명응 徐命膺- 1716-1787 학자, 자 君受, 호 保晩齋. 실학을 연구 북학파의 비조로
 불림. 1755년 청에 서장관으로 다녀옴. 대사헌, 황해도 관찰사, 이조, 호조, 병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봉조하에 오름.
서산대사 西山大師- 1520-1604 속명은 최휴정崔休靜, 호는 청허淸虛, 별호 서산대사
 아명은 운학, 다선일여의 경지를 읊조린 차시가 많다. 해남 대흥사에 자신의 가사
 와 발우를 보관하라고 제자유정(사명당)과 처영에게 유언. '승려의 일생은 차 달여
 趙主에게 바치는 것'이라고 함. 차와 더불어 자연과 하나됨을 우금偶昑 道雲禪子
  윤방백차운유향봉 등 시를 통해 나타냄.
서성환 徐成煥- 1924-2003 호 粧源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개성에서 성장, 화장품 가내수공업 이어받아 1945년 해방
 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사업에 헌신, 마침내 태평양화학(아모레퍼시픽)을 세워 국산
 화장품 브랜드를 창출한 사업가로, 또한 일찍이 제주와 호남에 차재배 단지를 성심
 으로 일구어, 말년의 모든 열정을 우리 차문화 전통을 되살리는데 힘을 쏟았다.
특히 차의 대중화를 위하여 크게 공헌했는데
1980년 제주도에 차밭을 일구고, 1982년 4월 '동다송'과 '다신전'을 번역 발간하고
1983년 봄부터 '설록차'를 시중에 선보이며 대중화를 선도했다.
1984년 '생활다례', 1987년 '한국의 차시'를 엮어 발간함.
2001년 테마공간 <오' 설록 티뮤지엄>을 설립해 무료관람 관광지를 만들었다.
설암추붕 雪岩秋鵬- 1651-1706 속성 김씨, 법호 설암, 열살에 출가, 묘향산 보현사의
 월저도안의 법을 이었다. 선교 양종에 통달하고 총림의 종사로 추앙받은 차인이다.
대흥사의 대종사로 '설암잡저' '설암난고' 등을 남김.
센리큐 千利休- 선사. 일본 전국시대 茶道의 대성자. 일본에서 茶祖로 불리며 和敬
 淸寂의 정신을 강조하였다. 1585년 천황 앞에서 茶會를 시연하여 리큐利休라는 이름
 을 받았다. 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충돌하여 결국 할복하였다.
설총 薛聰 - ?~692~746~? 원효와 요석공주 아들로 이두문자를 집대성한 학자로
   신문왕(681~692)의 자문역으로 花王戒를 올렸는데 여기에 '임금은 차와 수로
   정신을 깨끗이 해야한다'는 내용이 있다.
성현 成俔 - 1439~1504 호는 용재, 虛白堂
소식 蘇軾- 자는 자첨子瞻, 호는 東坡. 東山居士. 中 北宋의 문인. 唐宋八大家. 화 에
  능함. 저서 소동파전집. 부친 소순蘇洵, 아우 소철蘇轍과 삼소로 불린다.
소요태능 逍遙太能- 1562-1649 속성 吳씨, 법호 소요, 시호 慧鑑禪師(효종이 내림)
 백양사에서 출가, 부휴선수에게 배우고, 휴정 밑에서 20 여년 공부, 임진왜란때 승군,
 연곡사에서 입적. 禪의 고승으로 차를 가까이함. 문집 '소요당집'에 조주차 시가있다.
 <우영조주차> '만나는 사람마다 차 마시고 가라지만/ 청평일곡을 아는 이 거의
 없네/ 불문의 손님 대접 이와 같아서/ 수많은 세월을 가풍으로 전해오네'
소이 蘇이- 中 唐나라 사람. 행적 없다. 저서 '十六湯品'
  茶書 十六湯品을 통해 '茶經'에 기록된 煮茶法을 분석 16가지로 설명
송명흠 宋明欽- 1705-1768 학자, 자 晦可. 호 역泉. 浚吉의 후손
 이재의 문인. 경연관, 서연관 등을 거침. 그는 드물게 차를 마시고 中得에이르고,
 中和의 경지에 이른다고 했다(즉 中正을 얻어 和에 이름)
송시열 宋時烈- 1607-1689 호 尤庵 사적 대전 남간정사, 서인의 영수, 사후 그를 제향
 하는 서원이 전국에 70여개소, 사액서원만도 37개소, 1744(영조20) 문묘에 배향됨.
 문집 宋子大全에 숭륭(손飡-밥을 물에 만다는 것)은 번거로우니 차를 사용하는 의례
 를 권장.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 외가에서출생 26세 까지 살았다.
 학문은 8세 친척 송준길의 집에서 12세 부친에게 격몽요결 등을 배움, 혼인 후 김장
 생 문하에 들어가 예학을 배우고, 김장생의 사후 아들 김집에게 학문을 마쳤다.
 27세 생원시에 장원급제 곧 봉림대군(효종)의 사부가됨. 벼슬은 효종 때 이조판서,
 현종때 좌의정과 영의정으로 잠시 관직에 나아갔을 뿐이다. 조대비의 1,2차 예송에
 서 남인에 패배해 삭탈관직되고 유배- 서인 재집권 정계복귀- 이후 기사환국 때 제
 주도 유배중 83세 때 서울로 압송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음. '예가 문란하게 되
 면 정치가 문란하게 된다'고 서인과 남인, 서인 중에 노론과 소론 등 당쟁의 중심에
 섰던 우암이다. 조선의 학자이자 정치가. 시호는 文正. 검소하고 고집통이었지만
  茶만큼은 소중히 생각해 茶童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수철화상 秀徹和尙 -817~893 속성 김씨. 차를 즐겼는데 비문에 茶에관한 기록.
숙선옹주 淑善翁主- 1793-1836 정조와 綏嬪 박씨 사이 태어난 순조의 여동생.
12세에 홍현주와 혼인 아들 하나를 남기고 44세에 졸. 시문에 능해 200여 수의 시를
 남김
 시오 始悟- 1778-1868 호-호의縞衣 속성 丁씨 초의와 완호, 윤우의 법맥을 이은 대둔
 사의 승려, 다산은 그가 한집안이라 하여 아껴, 1815년 3월에 떡차 열덩이를 보냈고
 후일 해배 이후에는 자신이 만든 차를 두릉으로 올려 보냈다.
1830년대 교유한 다산의 장남 정학연이 호의의 차를 장춘차로 불러(長春洞은 대둔
 사 골짜기 이름) 그외 두륜진차, 두강차, 手製佳茗, 수제진품 등으로 불림
 신경준 申景濬- 1712-1781 실학자, 자 舜民, 호 旅庵.
聲律, 의복, 법률, 기서 등 통달. 지리학 연구, 좌승지, 제주목사 역임.
저서- '八道地理志' '東國輿地圖' '訓民正音韻解' 등
 신광수 申光洙- 1712-1775 자 聖淵, 호 石北. 서화에 뛰어남
 가난해 왕이 집과 노비를 하사 승지가 됨. 대표작 '關山戎馬', 제주에서 쓴 '浮海錄'
신문왕 新文王 - 681~691 신라 31대왕 화왕계에 차이야기가 있다. 삼국유사에 정신
  왕으로 기록 됨.
신숙주 申叔舟- 1417(태종17)-1475(성종6) 호 保閑齋 자는 泛翁. 1462(세조8) 영의
 정. 의정부에 묘. 나주 출생, 7세 대제학 윤회 문하에서 공부하다 16세 윤회의 손녀
 와 혼인, 23세 때 친시문과에 급제-종7품 전농직장-집현전 부수찬-부제학 등 역임
 하다-1452(문종2) 동갑인 수양대군이 謝恩使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수행하
 며 야심가로 변모. 어린 단종이 폐위되자, 역모에 가담한 신숙주는 한글창제와 여진
 을 토벌한 공로 및 탁월한 경륜으로 6대왕을 섬긴다. 그러나 '숙주나물보다 못한 변
 절자'로 회자-
 저서: 보한재집, 북정록, 해동제국기, 사성통고, 국조오례의, 세조실록, 고려사절요
 등 수많은 서적 편찬이 업적을 남겼지만 유학자로서 절의를 지키지 못한 아쉬움...
 <차시> 도갑산 절 작설차와/ 옹기마을 울타리에 떨어진 눈 속의 매화꽃은/ 마땅히
 내게 고향 생각의 뜻을 알게 하니/ 남쪽 고을 옛일들이 떠올라 기뻐하노라.
신위 申緯- 1769(영조45)-1845(헌종11).호 紫霞, 警修堂 掃落葉頭陀. 자 漢수, 본관
 평산. 병조참판, 호조참판. 경수당전고, 焚餘錄, 유적지-시흥 자하산장. 申崇謙 시조,
 少論 부친은 대사헌 大升, 1799(정조23) 알성문과 급제 抄啓文臣으로 발탁됨, 1812
 (순조12) 주청사 서장관으로 청나라 연경에가 대학자 翁方綱 부자를 만나 학문의
 눈이 열렸으며 이후 詩書畵 삼절로 불림, 묵죽화를 중국인들이 욕심냈다고 한다.
 벼슬은 순탄치 못해 병조참지-곡산부사-승지-춘천부사-병조참판-강화유수 등
 유배를 가면서도 차도구를 가지고 다닐정도로 풍류를 즐기는 차꾼.
 1831(순조31) 4월 해배길에 대흥사에 들러 초의를 만나 草衣詩藁 서문을 써준다.
 '警修堂全藁'에 실린 그의 시 400여수 중에 차에 관한 시문이 백십여수나 된다.
 대표적 시인 : 신라 최치원, 고려 이규보, 이제현, 조선의 신위.
 '돌냄비에 차 달이니 떡차향기 나고/ 구리병에 길은 물은 금옥 부딪치는 소리 낸다/
 문서들로 몸이 피로하여 하품과 기지개 켤 때/ 이미 솔바람 소리 나고 두 번째 찻물
 이 끓네' 그는 초의와 교신이 잦았는데 이는 후배인 추사와도 관련이 있다. 茶山傳
 法 차도만듬
 신유한 申維翰- 1681-1755 자 周伯, 호 靑泉.
급제해 제술관으로 통신사행 따라 일본에 다녀오면서 '海游聞見雜錄'을 씀.
 '나라 안의 귀천 남녀를 막론하고 물을 마시는 법이 없고 모두 차를 마신다. 그래서
 집집마다 차를 준비해 두는 것이 곡물보다 심했다. 차는 곧 작설 같은 것으로 푸른
 잎을 따서 말려 보드라운 가루로 만들어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신다. 혹 긴 잎은 끓여
 서 건져내고 마신다. 매 식후에 한 잔씩 마시는데 시중 도로에 이르면 솥을 걸고 차
 를 달이는 자가 길게 늘어 있다. 크고 작은 사신 행차의 수백명이 날마다 푸른 차 한
 홉과 푸른 찻잎 한 묶음을 받았다. 관을 지날 때는 따로 다승을 두어 밤낮으로 차를
 달여서 기다렸다. 그들의 풍속의 일상적인 예법이 차의 예와 같았다.
 (류건집: 한국차문화사)
신익성 申翊聖- 1588-1644 문신, 자 군석, 호 낙전당. 영의정 欽의 아들.
선조의 딸 貞淑翁主와 혼인 東陽尉에 봉해짐.
척화 5신중 한 사람- 청에 붙잡혀 갔다 돌아와 詩와 茶酒로 소일.
신익전 申翊全- 1605-1660 문신, 자 汝萬, 호 東江. 영의정 欽의 아들, 익성의 아우.
김상헌의 문인. 병자호란 때 청에 잡혀갔다 돌아와 광주목사, 도승지 역임.
역학에 능, 문장과 필법에 일가. 집안이 모두 차를 즐김.
신정 申晸- 자 白東, 호 汾厓. 익전의 아들.
전라도 관찰사. 서인, 청에 사신으로 다녀옴. 대사성, 예조, 공조, 이조 판서를
 지내고 강화부 유수로 죽음. 시문에 능, 글씨를 잘 쓴 차인.
 <獨夜> '섣달의 매화가 사람 향해 웃으니/ 등불과 함께하여 내 마음 曲盡하네/
추운 집에 눈녹여 차달이는 흥은/ 값비싼 장막 속의 따뜻함에 비교가 되리'
신정하 申靖夏- 1680-1715 호 恕庵. 김창협의 문인
 신헌 申櫶 . 초명 申觀鎬 - 1811-1884
초의에게 준 여러명사들의 시문첩을 옮겨적은 '금당기주琴堂記珠' '초의시집발'
 '초의선사 화상찬' '초의 대종사탑비명' 등 초의와 관련된글을 가장 많이 남긴인물
1843년 11월 15일 전라우수사로 해남에 부임 초의와 교분 초의보다 25세 아래
 추사의 제자로 30세에 금위대장을 지내고 , 1866년 병인양요 때 총융사로 강화도를
 수비하고, 병법에 밝아 '민보집설民堡輯說'을 엮음
1876년 강화도조약과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때 수석대표로 활동
 신헌구 申獻求 - 1823-1902 자- 秀文, 호- 秋堂, 玉枕道人, 白坡居士
추당잡고 권1에 '茶說', 茶詩도 남김. 동다송 끝에 시를쓴 백파거사는 그의 별호
 본관-고령, 1869년 승정원 동부승지. 1875년 봄(대원군명) 해남으로 내려와-
1880년 봄 상경때까지 5년여 해남지역 문인 松坡 李喜豊(1813-1886)과 교유
 수많은 시문수답(양파집兩坡集에 기록)
신흠 申欽- 1566-1628 자 敬叔, 호 象村, 玄軒. 개성사람.
明에 다녀오고, 인조반정 후 이조판서, 영의정 역임. 정주학자, 한학4대가
 차를 마시며 대대로 전하고, 차시도 많이 남겼다.
 '처마에 비 듣는 소리 아직도 남았는데/ 10월의 추위는 그래도 견딜만 하다네/
오리 모양 향로에선 용연향 피어나고/ 풍로에 끓는 차는 둥근 게눈 맺힌다네'
심육 沈육- 부친이 영의정. 차를 좋아하고 문장에 능해 '樗村先生集'을 남김
'몸은 산처럼 우람하나/ 언제 병조로 돌아갈지 모르네/ 차가 익어도 오는 이 없고/
좋은 집에서 애오라지 잠만 잔다네'
안영 晏婴- 흔히 안자晏子라고 부름.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 경공景公의 신하로 정치
  사상가. 저서- 晏子春秋
안진경 顔眞卿- 709-785 唐대의 대서예가, 자가 淸臣, 중국 섬서성 서안시 사람
 안사의 난 때 형 안고경과 반적을 토벌 20만 대군을 통솔, 숙종 때 공부상서겸 어사
 대부, 대종대에 이부상서 태자태사로 노군공, 안로공. 덕종대에 이희열에 의해
 교수형을 당함.
양팽손 梁彭孫- 1488(성종19)-1544(인종1년) 호 學圃, 1510(중종5) 생원시 1등(조광
 조는 진사시 1등)29세 문과에 급제, 공조좌랑, 형조좌랑, 사간원 정언과 사헌부 지
 평 등 역임 홍문관 교리 재직중에 기묘사화-상소문 대표로 삭탈관직-고향 능주로
 낙향 쌍봉마을에 독서당을 짓고 詩畵潛心(글과 그림으로 마음을 닦는다), 능주로
 유배와 사약받은 조광조의 시신을 손수거둔 차의 성품을 닮은 '맑고 향기로운 사람'
 화순 학포당.
에이사이 榮西- 일본 가마쿠라鎌倉시대의 승려. 중국 송나라에서 유학. 1187년 일본
 에 차를 들여왔다. 임제종 겐닌사建仁寺파의 개조가 되며, 1215년 壽福寺를 창건
 선교 활동. 저서- 興禪護國論. 喫茶養生記 등
언기 彦機 1581~1644 조선 중기 승려. 법호는 편양 서산대사 문하 편양파의 개조이다.
  山居, 차법륜총섭운 등 차와 관련된 글이 있다.
연기조사 緣起祖師- 구례 화엄사 창건주이며 長竹田에 차를 심었다.
 황룡사 출신 승려이며 경덕왕(742-765) 때의 인물, 의상의 제자. 또한곳 야생차밭인
 효대孝臺(연기조사가 어머니에게 차를 올리는 효성스러운 모습의 석물이 조각돼
 붙여진 이름)가 있다.
연담유일 蓮潭有一- 1720-1799 속성 천씨, 법호 연담, 18세 출가. 많은 고승들에게
  배움 저작 '화엄경' '능엄경' '원각경' '제경회요' 등
 '발 밖엔 구름 일고 개울에는 달 비치네/ 반에 나물 있고 솥에는 끓인 것 있고 병에는
 차가 있어 기쁘다네'
영랑令郞, 술랑述郞, 남랑南郞, 안상安詳 - 신라시대 화랑 國仙으로 강릉 寒松亭
 밑에 이들이 차를 찧어 달여마시던 茶泉 돌솥 돌절구 등이 남아 있다.
영수합 서씨 令壽閤 徐氏- 1753-1823 관찰사 徐逈修의 딸. 足睡居士 洪仁謨의 부인
 자녀 홍석주, 홍길주, 홍원주, 홍현주 등 모두 차인으로 길러,
 동다송을 쓰게만든 정조 사위 홍현주(1793~1865)의 어머니이다. 차를 즐겼고 차시
 도 여러편 전한다. '족수당집'의 '令壽閤稿'에 詩가 190여 편
예용해 - 1960년대 초반에 신문 지상에 차에관한 글을 연재한 지식과 견문을 가졌으면
 서도 평생을 차인이라 자처한 법이 없었던 소탈한 차의 세계를 걸음.
오도일 吳道一- 1645-1703 자 貫之, 호 西坡. 영의정 允謙의 손자.
 지평, 대사간, 도승지, 병조판서 역임. 중국에도 다녀옴.
 문장에 뛰어나고 술을 좋아한 차인.
 <선화당우중>'비 내리는 마을 터엔 버들잎만 푸르고/ 물 깊은 관가 못엔 연꽃 막
 피려하네/ 속병으로 술 끊은 것 싫지 않으며/ 쇠솥에 새로이 눈차 달인다네'
오암의민 鰲巖毅旻- 1710-1792 속성 김씨, 법호 오암, 모친 죽음보고 출가.
 많은 불경 공부해 嶺南宗正 추앙받아, 부친에 대한 효심 지극함.
오원 吳瑗- 1700-1740 호 月谷. 부제학. 泰周와 明安公主의 아들, 明나라에 다녀옴
오효원 吳孝媛- 1889- ? 호 小波. 초명 德媛. 의성의 吳時善의 딸로 서울에와 곤경에
 처한 아버지를 구한 효녀로 문재가 출중 했는데, 일본에 건너가 기부금을 받아서
 돌아와 명신학교를 세웠다. 1918년 윤명은과 결혼. 1929 '소파여사시집'간행 473수
 저명인사들과 교유 이토히로부미, 이완용과 친분, 당시 유행하던 다화회도 더러
 참석
옹방강 翁方綱- 호 覃溪. 중 청나라 때 대학자. 김정희와 교유
  저서 兩漢金石記, 精義考補, 復初齋全集 등
왕휘지 王徽之- 자는 자유子猷. 王羲之의 다섯째 아들. 중국 동진東晉때의 서예가.
 세상의 잡다한 일에 관심이 없었고, 대나무를 차군此君 이라 부르며 좋아했다.
 대표작- 王徽之愛竹圖. 신월첩新月帖 등
 용악혜견 龍岳慧堅- 1830-1908 성 김씨, 법호 용악, 어려서 출가, 토굴에서 금강경을
 읽음, 통도사-해인사에서 고려대장경 4부를 간행. 차시 20여편, 저서 '용악집'
요일 寥一 1100년대 고려때 승려, 興陽 李氏의 시조 李産林의 二子. 쌍명제중부,
  乞退, 이인로를 양육한 백부이다. 무사정권에 비판적인 승려였다.
원감국사 圓鑑國師- 호 법환, 충지沖止, 밀암. 1226-1292 법명은 원개, 원감은 시호
 송광사 16국사 중에 茶詩를 가장 많이 남김
 스님 문집에 山居 등 20편의 차시가 동문선과 원감국사가송에 전해진다..
 전남 장흥출신 위씨, 9세부터 공부 17세에 司院試에 합격, 19세 장원급제
 영가서기로 부임,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와 벼슬이 금직옥당에 이름, 29세에
 출가. 승주 송광사 감로암.
원광법사 圓光 542~640 신라 眞興王(534~576)대에 태어나 중국 진~오나라 구법승
 으로 화랑의 세속오계를 설하였고 虎九山에서 차생활을 익혔다.
원랑 圓郞 ?~883 속성은 朴씨. 원랑은 시호이다.
원효대사 元曉大師- 617(진평왕 39)~686(신문왕 6) 속성은 설薛씨, 아명은 서당,신당
  원효는 법명. 불지촌(경산시 자인면)출생. 설총薛聰의 아버지이다. 소년 시절 화랑
 이 되었다가, 648(진덕여왕2년) 황룡사로 출가. 34세에 의상과 당나라 유학길에
 고구려군에 잡혀 귀향, 44세에 해로로 유학길에 나섰지만 밤중에 해골 에 괸 물을
 마시고는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깨닫고는 의상과  헤어져 돌아오고만다. 이후 태종무열왕의 둘째 딸로 백제와의 전투에서 남편을 잃고 상심해 있던 요석공주와 정을 나누고 설총을 낳는다. 이때부터 자신을 복성거사라 칭하고 광대복장을 하고 민중속으로 뛰어들어 無碍歌(모든 것에 거리낌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는다)를 부르며 다닌다. 和諍을 부르짖은 반전주의자엿던 그는 평생 불교 사상의 융합과 실천에 힘썼다. 고려때 이규보가 쓴 南行月日記에 茶人 원효에 관한 기록이 전한다.
'다도란 차 한잔에 분열을 씻어버리는 것'- 입적 때까지 저술: 大乘起信論疏, 금강삼매경론 등 1백여부 240권(10부 22권 현존). 수도한 부안 개암사 뒷산 울금바위 중 오른쪽 원효방(정남향 다섯평 정도의 동굴)이 있다.
원천석 元天錫- 1330-? 원주출생, 호 耘谷, 치악산에 묘소.
 고려 말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치악산으로 숨어 부모를 봉양하며 ...
 일찍이 이방원(태종)을 가르친 적이 있어, 후일 치악산까지 찾아왔으나 출사하지않음
 <차시> 그리운 서울 소식 숲 속의 집에 이르니/ 가는 풀에 새로 봉한 작설차라네/
 식후에 마시는 한 사발은 더욱 맛있고/ 취한 뒤의 세 사발은 더더욱 맛있다오/
 마른 창자 적신 곳에 찌꺼기 없고/ 병든 눈 맑아져 현기증이 없어지네/ 이 물건
 영묘한 공덕 헤아리기 어렵고/ 시마詩魔가 다가오니 수마睡魔는 없어진다네.
월명사 月明師 700년대 신라 경덕왕(742~764)대 화랑출신 승려 760년(경덕왕 19년)
 도솔가를 지어 두개의 해가 나타나는 괴변을 물리치고 왕에게 차와 옷 한벌을 선물
 받았다.
유도원 柳道源- 1721-1791 학자, 자 叔文, 호 蘆涯. 參議 觀鉉의 아들.
 만년에 僉知中樞府事. '常變通考'를 쓴 동생 柳長源, 柳致明 등의 차인을 배출함.
유정원 柳正源- 1703-1761 학자, 자 淳伯, 호 三山. 錫龜의 아들. 집안에 많은 차인 배출
 1735년 증광문과에 급제 지평, 수찬, 대사간을 역임. 제자백가를 섭렵하여 천문,
 지리, 음양, 복서, 주수로부터 병률, 도학에 까지 정통함. 저서 '三山文集''河洛指要'
 등 茶山은 '牧民心書'에서 조선 淸白吏의 대표적 인물로 삼산을 꼽았다.
육우 陸羽- 자는 홍점, 호는 景陵子, 아호는 桑苧翁, 東岡子, 東園先生 등. 中 唐. 茶神으로 받들어짐. 저서 茶經(760년 上中下 3권), 顧渚山記, 南北人物志, 吳興歷官記,
 源解 등이 있다.
 윤두서 尹斗緖- 1668(현종9)-1715(숙종41) 호 恭齋. 윤선도의 증손. 시문, 그림 잘그림
玄齋 沈師正, 謙齋 鄭敾 과 함께 조선의 삼재로 불림
 윤봉구 尹鳳九- 1681-1767 학자, 자 서응, 호 병계. 권상하의 문인
 급제해 청도군수, 판서에 이름.
윤선도 尹善道- 1587-1671 문신, 자 約而, 호 孤山, 海翁. 남인가문,
 진사로 권신 이이첨을 탄핵하다 경원, 기장, 영덕 등지에서 20여년 유배. 19년의
 은거생활. 호조참의, 동부승지. 복식문제로 유배되 나이 80에 풀려나 보길도로
 들어갔다.
 漁父四時詞, 山中新曲, 五友歌 등 많은 단가와 시조남겨 정철, 박인로와 더불어
 삼대가인歌人. 五友(물, 바위, 솔, 대나무, 달)라는 자연을 벗 삼아 선비의 삶.
 완도 부용동 세연정, 綠雨堂, 동천석실.
의순 意恂- 1786(정조 10)~1866(고종 3). 속성은 장張. 본관은 나주, 자는 중부中孚
 호는 草衣. 조선 후기의 승려. 15세 때 남평 운흥사에서 출가. 丁若鏞에게 시문을
 배웠고, 김정희 등과 교유하였으며, 조선다도의 정립자로 불린다. 두륜산에서 40년
 간 수행하였다. 저서- 東茶頌. 一枝庵遺稿 등
이규경 - 백과전서적 저작 '오주연문장전산고' 중 '전과다탕변증설' 따로 남김
  대용차에 대한 내용이 상세한데 모두 23종의 茶湯을 소개했다.
  (기국차, 구기차, 청천백석차, 강귤차, 온조탕, 향소탕, 매화차, 수문탕, 수지탕,
  회향탕, 행락탕, 모과장, 포도차, 당귀차, 홍국차,오미자차 등)
이경석 李景奭- 1595-1671 문신, 자 尙輔, 호 白軒. 德泉君의 6대손
 김장생의 문인. 척화파로 김상헌과 청에 1년간 구금생활, 후에 이조판서- 영의정을
 지냄. 김자점이 효종의 북벌계획을 밀고하여, 책임을 지고 청에 다시 감금되었다 풀
 려나 기로소에 들어감. 그의 다풍은 증손 眞望과 다음대 匡德에도 이어졌다.
 '개울에선 옥 굴리는 물소리 들렸는데/ 꽁꽁 언 얼음 아래 아직 그 소리 남았네/
 차 달여 마셔보니 옛 맛 그대로고/ 취한 술이 곧 깨어 한기 스미네'
 <寒松亭> '신선들의 차 부뚜막 아직도 남아 있고/ 차 달이던 샘물은 지금도 솟아
 나네/ 오늘의 한송정은 적막에 쌓였는데/ 바다 위의 달만은 변함없이 비치네'
이경전 李慶全- 1569-1644 호 石樓.
 산해의 아들, 형조판서, 명에 다녀옴.
이곡 李穀 1298~1351 초명은 雲白 자는 仲父 호는 익재益齋, 實齋, 역옹. 지금의
  조계산 송광사의 경호선사가 해마다 보내주는 차에 대한 고마움을 시로 표현했다.
이관명 李觀命- 1661-1733 호 屛山.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옴. 좌의정을 지낸 차인
이광덕 李匡德- 1690-1748 자 聖賴, 호 冠陽. 景奭의 후손이며 眞望의 아들
 급제하여 영조의 신임 받아 교리, 전라도 관찰사. 청에 부사로 다녀옴. 여러대 茶家
이광사 李匡師- 1705-1777 호 圓嶠. 양명학 연구. 진도 적소에서 평생.
 '圓嶠體'를 이룬 서예가
이광수- 1892-1950 호 春園
 현대문학의 거봉, 천주교 신자, 해방전 불교로 귀의 등 양면성 보임.
 그는 금강산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쫓기던 8촌동생 운허 스님을 만난다. 해방후 친일
 변절자라 하여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운허스님이 머물고 있던 남양주 봉선사로 몸을
 숨긴다. 그가 묵었던 방은 茶經香室. 이때 1946.9.18일자 '산중일기'에 연시조 차시를
 남긴다. '화로에 불 붙어라 차 그릇도 닦았으라/ 바위샘 길어다가 차 달일 물 끓일
 때다/ 산중에 외로이 있으니 차맛인가 하노라...'
그도 한 때는 동경에서 2.8독립선언을 주도했고, 상해임시정부에 일조했다고 옥살이
 도했었다.
 '산중일기' 9월20일자의 글 '화로에 물을 끓여 미지근히 식힌 뒤에/ 한 줌 차를 넣
 어 김 안나게 봉해놓고/ 가만히 마음모아 이 분 삼 분 지나거든 찻종에 따라내니/
호박이 엉키인 듯 한 방울 입에 물어/ 혀 위에 굴려보니/ 달고 향기로움 있는 듯도
 없는 듯도/ 두 입 세 입 넘길수록 마음은 더욱 맑아/ 미미한 맑은 기운 삼계에
 두루 차니/ 화택 번뇌를 하농안 떠날러나/ 차 물고 오직 마음 없었으라/ 맛 알리라
 하노라
 이규보 李奎報- 1168-1241 여주 출생, 호 白雲山人, 白雲居士, 止軒, 삼혹호三酷好
  선생. 강화도에 묘가 있음. 고려 문장가. '차 한사발은 바로 참선의 시작'이라고 하고
  '차의 맛은 道의 맛'이라며 茶禪一味를 주장하엿다.
  사마시에 네번째 응시 수석 급제-관직 못얻고 25세 개경 천마산으로 들어가 장자의
  걸림 없는 경지를 흠모 호를 백운거사라 짓고 차살림을 하다 1년만에 개경으로 나와
  독서로 소일, 그때 서사시 '동명왕편'을 지음.
 그는 거문고까지 애지중지하여 스스로 삼혹호三酷好 선생이라 불렀다.
 저서 '동국이상국집'에 茶詩 40여편을 포함 2천수 이상의 시를 남겼다.
 당나라 白樂天을 스승으로 삼아-해동의 배낙천이라 불림.
 40여편의 차시는 당시의 차생활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早芽茶, 떡차 만드는 법, 차의 포장법, 차살림의 茶具들, 백성을 괴롭히는 茶稅 등.
 운봉에 사는 노구선사가 조아차를 보내오자 이를 儒茶라 이름하고 '유차송' 시를
 지었다.
  <차시> 납승이 손수 차 달여/ 내게 향기와 빛깔을 자랑하네/ 나는 말하노니 늙고
  목마른 놈이/ 어느 겨를에 차 품질을 가리랴/ 일곱 사발에 또 일곱 사발/ 바위 앞
  물을 말리고 싶네.
이규태 李奎泰- 1933~2006.대한민국의 언론인. 연세대 졸업, 1959년 조선일보사에
  입사 문화부-사회부-편집부 기자를 거쳐 논설위원을 역임. 조선일보에 1983년 3월
 부터 2006년 2월 23일까지 '이규태 코너'를 23년 동안 6,702회 연재해 언론사상 최
 장기 칼럼 연재 기록을 세웠다.
이단상 李端相- 1628-1669 문신, 자 幼能, 호 靜觀齋. 대제학 明漢의 아들
 교리, 정랑, 인천부사가 되었으나 사퇴하고 학문연구에 힘썼다.
문하에 학자 김창협, 김창흡, 임영 등 배출.
이단하 李端夏- 1625-1689 자 季周, 호 畏齋, 松磵. 植의 아들. 宋時烈의 문인.
서인으로 정쟁에 말려 귀양-복직, 좌의정 역임. 대대로 전승된 차인.
 '시로 겨루고 술 많이 마시는 것 옳지 않으니/ 흥이 지나면 병폐가 되니 어이하리/
제일 좋은 것은 문 닫고 한가로이 앉아/ 눈녹여 차 달이며 물 끓는 소리 듣는 것이
 라네'
이담로 李聃老- 1627-? 자-延年. 호-白雲洞隱 ,'白雲洞名說' 지음
 둘째손자 李彦吉(1684-1767)과 백운동별서를 조성함
 이덕형 李德馨- 1561-1613 호 漢陰.
이산해의 사위, 명나라에 두번 다녀온 차인.
이만부 李萬敷- 1664-1732 호 息山. 역학에 조예, 서예 잘함.
  여러번 벼슬 사퇴하고 학문 연구에 몰두
이명한 李明漢- 1595-1645 자 천장, 호 백주. 정구의 아들.
 공조좌랑, 폐모론으로 파직, 인조반정 후 다시 출사. 도승지-대제학-이조판서 역임.
 척화파로 청에 수차 구금됨.성리학 깊이 연구. 시문에 뛰어남.
 <夜過樂全>'은하수 처음 돌고 북두가 기울어지니/ 등불 밝힌 그윽한 방엔 웃고 얘기
 하는 소리라네/ 햇찻사발 드니 추위 좀 가시는데/ 좋은 손님 못 가게 차를 권한다네'
이목 李穆- 호 寒齋. 1471(성종2) 김포-1498년(연산4) 戊午士禍로 28세에 참형을 당함
 14세에 점필재 김종직 문하 도학 공부. 19세 과거 갑과합격. 도학 이념의 강골. 문인
 1494(성종25) 24세 중국 燕京에서 유학. 25세 문과 장원급제하고 480자로 된 茶賦를
  지어 문명을 떨치기도 다부에는 차이름과 산지, 차나무의 생육 환경과 예찬, 차달여
  마시기, 일곱잔 차의 효능, 차의 5가지 공로, 차의 6가지 덕성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하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자 윤필상을 탄핵하려다 오히려 공주로 유배를 간다.
 1495(연산1) 증광문과에 장원하여 1497년 27세 賜暇讀書 한뒤 典籍과 宗學司誨,
 영안도(함경도) 평사 등을 역임하다 1498(연산4)28세 윤필상의 모함으로 무오사화
 에 희생-1504(연산10)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비극을 맞지만 후에 신원되어 이조판
 서에 추증된다.
 문집 '李評事集' '寒齋文集', 1495년경 저술 '茶賦' (1321字 동다송보다 340여년 앞선
 茶書)- 서문에 이어 중국차의 품종과 산지 및 풍광, 煎茶와 七修, 차의 공과 덕,
 결말에 차를 예찬함과 동시에 내 마음의 차(吾心之茶)로서, 겉으로는 육신의 찌꺼
 기 씻어내고, 병마를 몰아내며, 정신의 고통까지 덜어내는 茶는 上品이든 次品이든
 무슨 상관이랴. 그러니 차야말로 군자들이 반드시 가까이 해야 할 것이라 했다.
 2004년 한국차인연합회에서 茶仙으로 추대 매년 獻酌, 공주 유배지에 충현서원이
 있다.
 <茶賦 중 차 달이기 부분> '차를 끓이는 순간만은 세속의 먼지를 털고 깨끗한 정신
 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래서 손수 찻사발을 씻는 것이니, 이는 자신의 淨化를 뜻한
 다. 서두를 것이 없다. 예부터 차를 끓이는 것은 물을 끓이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조용히 깨끗한 石泉水 길어다 끓이며 한가로이 煎茶三昧에 빠져 즐기는 것이다....'
이무방 李茂芳 1319~1398 자는 석지, 光陽 李氏의 시조. 충목왕 때 문과에 급제.
  茶詩 寒松亭.이 있다.
이민구 李民求- 1589-1670 문신, 자 子時, 호 東洲, 지봉 李粹光의 아들
 교리- 이조참판 지냄. 詞賦에 능한 차인이었다.
 '성스런 물 인성도 바꾸나니/ 능히 탁한 것을 맑게 한다네/ 찻사발 멈추고 마시고
 싶지 않음은/ 내 원래 총명함을 싫어하기 때문이라네'
 '예부터 성현들은 편한 자리 없었는데/ 지금은 온 세상이 못할 일이 없다네/ 차화로
 술그릇도 몸에 관한 물건이니/ 이사할 때 언제나 종들 보기 부끄럽다네'
이민보 李敏輔- 1720-1799 자 백눌, 호 상와. 단상의 증손
 음보로 벼슬길 輔國崇祿大夫
이민성 李民宬- 1570-1629 자 관보, 호 경정. 병자호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시문과 글씨에 능한 차인.
이백 李白- 자는 太白, 호 청련거사靑蓮居士. 中 唐 시인. 저서 李太白詩集
(701-762) 촉나라 창명인. 그는 詩仙, 酒仙, 茶仙으로 불렸다.
이상적 李尙迪- 1803(순조4)-1865(고종2) 자- 惠吉, 允進 호- 우선藕船.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그를 위해그린 歲寒圖에 얽힌 인연으로 이름나
 문집 24권 안에 750여 편의 시문 중 차에관한 것 30여 편이 있다.
세습적인 역관 집안 출신,중국에 12회나 사행으로 오가며 온갖 명차를 두루맛봄
白山茶歌로 백산차 증언과, 고려고탑에서 발견된 龍團勝雪茶에 관한 증언을 남김
 문집 恩誦堂集(1848년 북경에서 吳贊이 펴냄)
1862년(철종13년) 1월20일(60세) 종신직인 지중추부사에 임명됨
 이상정 李象靖- 1710-1781 자 景文, 호 大山. 李裁의 문인.
예조와 형조의 참의를 지낸 후 낙향, 퇴계 학통을 받은 金誠一-張興孝-李玄逸-李裁
로 이어지는 성리학을 연구 柳致明에게 전함. 高山에서 학문을 닦고 차를 즐김.
그의 글속에 당시 영남에도 상식에 물로 차를 대신했음을 기록함.
이색 李穡- 1328-1396 호 목은, 찬성사 곡穀의 아들, 이제현의 문인, 대사성.
진사가 된 후 원나라로가 성리학을 연구, 3년 만에 부친 부음을 듣고 귀국한다.
이후 고려와 원나라를 오가며 양국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에 등용된다.
대제학 때 학칙을 제정한 성균관에 정몽주, 이승인 등을 학관으로 채용 유학의 보급
 과 성리학 발전에 공헌케 함. 1389(공양왕1) 위화도 회군사건으로 이성계 일파가 세
 력을 잡으면서 장단에 유배-이듬해 청주 옥에-장흥으로 유배되었다가 태조(이성계)
의 명으로 韓山佰으로 봉해지면서 석방되나 조선 조정에 끝내 나가지 않고 여강으로
 가던 중에 생을 마감한다. 유적지-여주 신륵사, 한산 문헌서원, 장단 임강서원 등
 훗날 不事二君을 지킨 고려 충신을 말할 때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를
三隱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는 척불론자임에도 스님들과 교유가많았다(나옹선사, 행제선사, 담선사, 영공 등)
이수광 李수光- 1563-1628 문신, 자 潤卿, 호 芝峰.
병조판서 希儉의 아들. 과거 급제 벼슬을 하고 임진왜란 때 황간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와 진위사로 明에 다녀옴. 인조반정, 정묘호란을 치르고 이조판서가 됨.
중국에 수차 다녀오면서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를 얻어와 '지봉유설'을 간행했다.
차를하며 많은 기록도 남김. 후일 가문의 후손들이 차를 즐겨마셔 차의 명문이 된다.
 <閑居> '산중의 부귀는 금은초이고/ 길옆의 풍류는 여기화라네/ 흥이 다해 돌아올
 땐 숲 그늘이 석양인데/ 아이 불러 물 길어서 햇차를 달인다네'
이승훈 李承薰- 1756(영조32)-1801(순조1) 호 蔓川. 세례명 베드로. 한국 천주교 창설
 자의 한사람으로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이다. 신유사옥 때 참형. 저서 만천유고
 이승휴 李承休- 1224-1300 자 休休, 호 動安居士 모두 불교용어로 불교에 심취했다.
경산부(성주) 가리현 출생, 12세 희종의 셋째아들인 원정국사의 절에서 名儒 신서
 에게 좌전과 주역을 배우고, 14세 부친 여읜 후, 종조모인 북원군 부인 원씨의 도움
 으로 공부를 계속한다. 29세 급제하여 어머니가 계신 삼척현으로 금의환향하지만
 몽고군의 5차 침입으로 강화도 길이 막혀 두타산 구동에서 농사로 10여년 은거한다
 이후 관직을 맡다가 원나라 사신의 서장관으로 간다. 충렬왕 때 우사간, 충청도안렴
 사가 되나 실정을 간언하다 파직된다. 이후부터 호를 동안거사라 하고 삼척 구동으
 로 들어가 당호를 容安堂이라 하고 '제왕운기', '내전록'을 저술함.
이시헌 李時憲- 1803-1860 이담로의 6대손. 다산의 막내제자- 월산 작설차를 만들어
 다산을 위해 지속적으로 차를 보냈다. 아들 이면흠(李勉欽 1824-1884)도 차인
 이식 李植- 1584-1647 문신, 자 汝固, 호 澤堂. 인조반정 후 형조, 이조, 예조판서를
 지냄. 한문학의 대가, 대대로 내려오는 차인 집안이다.
 '한낮의 그늘 드리운 고요한 붉은 대문엔/ 늦게 핀 꽃 헤치며 어린 제비 들쭉날쭉/
홀연히 부엌에서 새 불 피운 소식 듣고/ 새 물 길어 햇차 달이라 재촉했네'
이안눌 李安訥- 1571-1637 문신, 자 子敏, 호 東岳.
明에 다녀와, 동래부사, 강화유수. 연산군 때 은퇴- 인조반정 후 복직. 중국에 다녀와
 예조판서. 병자호란 때 인조를 호종했다. 詩에능해 권필과 쌍벽이었고 청렴한 차인.
 '낚싯배에 비 지나니 온 섬은 꽃밭이고/ 차화로에 연기 이니 달빛 창에 비치네.
이에이리 가즈오 家入一雄- 1900~1982. 일본인 산림기사. 1938년 무렵 전남 광주에
 서 근무하며 일본 차 연구의 선구자인 모로오카 다모쓰와 함께 한국 남부지방 일대
 토산차의 분포지를 현지 답사해 기록을 남겼다. 그 기록이 모로오카와 함께 저술한
 '朝鮮의 茶와 禪'이다.
이유원 李裕元- 1814-1888 호-귤산橘山
다산이 제법을 가르쳐준 보림사 죽로차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으로 알린사람.
거처에 별도로 茶屋을 마련 차를 즐긴 차인 그의 문집 '가오고략嘉梧藁略'과
'林下筆記'에보림사 죽로차와 함양의 죽전차, 발효떡차인 밀양황차, 제주의
 귤화차 등 우리차와 일본차, 중국차에 관한 기록을 남김
이은상 李殷相- 1903~1982. 본관은 전주, 호는 노산鷺山, 필명은 남천南川, 강산
 유인江山遊人, 斗牛星. 시조작가, 사학자. 가곡 가고파,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
 등을 작사 하였으며 대학교수를 비롯해 다양한 활동을 한 천재였다.
 시문집 鷺山文選, 수필집 無常, 이충무공일대기 등 10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이의현 李宜顯- 1669-1745 호 陶谷. 영의정. 청에 두차례 다녀옴. 김창협의 문인
 '一杯三椀氣淳和' 술 한 잔 차 석 잔에 기가 평온히 된다.
이이 李珥- 1536-1584 호 栗谷, 태어난 강릉 오죽헌(보물165호)
 어머니 신사임당을 16세 여의고- 19세 금강산으로 입산 잠시 불교 공부
 해동의 공자라 불릴 만큼 율곡에 이르러 성리학이 심화되고 주체적으로 수용했던 것
 인조 때 전국향교에 비치한 '격몽요결' 부록 祭儀抄에서 제례와 차례 때 차를 쓰라함
 병조판서 때는 선조에게 십만양병을 경연석상에서 건의함.
 아홉번 과거시험- 매번 장원급제함. 퇴계와 달리 理(본질)와 氣(현상)를 분리할 수
 없다는 理氣之妙를 주장했다. 母子가 모두 화폐에 오르는 인물이 됨.
 차시:나는 오막살이 돌밭 다시 가꾸어 차 마시며/ 한평생 가난 속에 자족하며 살리라
이인로 李仁老 1152~1220 초명은 得玉 호는 雙明齋 인천 이씨 진정한 차맛을 알고
 그 풍류를 즐기던 사람. 그의 저서 보현집에 茶磨라는 시를 통해  말차를 만들던
 풍속을 알려주고 있다.
이자현 李資賢 1061~1125 자는 진정, 호는 식암, 본관은 인현 이씨, 고려때 학자.
 예종이 차를 즐겨마시는 이자현에게 茶를 내렸다는 기록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