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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사발 보성덤벙이 한국,일본 순회전 - 송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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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차인연합회 작성일09-02-13 11:12 조회4,8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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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송 기 진 ☎ 016-602-1387)

1. 전시명
세계적인 명품 찻사발 보성덤벙이의 전승을 위한 한국, 일본 순회展

2. 전시 개요
 보성은 茶의 고장으로서 보성의 차를 담아내기 위한 보성만의 차도구가 절실하게 필요로 되는 현실적인 요구가 있어 왔습니다.

 이에 부응하여 과거 조선 초기에 보성에서 만들어져 일본으로 건너가, 다완(찻사발)과 酒器 등의 분야에서, 오늘날까지 고미술품애호가들과 차인들에게 대단한 명품으로 인정받고 있는 보성덤벙이(일본명 寶城粉引, 讀音 호조고비끼)에 대한 재현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현재 일본의 다도계에는 덤벙이기법으로 제작된 찻사발 중 3점(大名物2점(三好粉引,松平粉引), 中興名物(1점)이 名物로 지정되어 있음)

 재현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2001년부터 다양한 백토(화장토, 2차백토, 1차백토 등)를 이용한 다양한 덤벙이기법(생지덤벙, 초벌덤벙, 풀덤벙 등)과 점토, 물토와 재, 패석회, 장작가마 소성 등 재현에 관련된 수많은 실험과 연구발표를 진행하여 왔습니다.

 또한 보성덤벙이에 관련된 [도요지 지표조사와 재료분석], [보성덤벙이의 미적특성, 그리고 보성덤벙이의 역사적고찰], [보성덤벙이의 확산을 위한 컨설팅], [보성덤벙이 문화 확산을 위한 한,일 심포지엄, 보성덤벙이 재현사업] 등을 문화관광부와 보성군의 지원을 얻어 더불어 시행하여 왔습니다.

 이 번 전시는 이러한 보성덤벙이 전승사업에 연장선상으로 그 동안 재현 연구된 제작기술에 의해 재현된 작품들을 한국, 일본 교류전을 통하여 국내, 외에 널리 알림으로서, 유서 깊은 보성덤벙이 문화를 전승 보존시키는데 목적이 있으며, 본 전시는 보성군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후원으로 이뤄지는 행사입니다.
 
3. 전시 개요

◦ 전시장소 :  서울, 대구, 일본 동경
  ·서울展 : 서호갤러리(인사동)   
            2009년 2월 11일 - 2009년 2월 17일
  ·대구展 : 예송갤러리(대구)
            2009년 3월 2일 - 7일
  ·일본展 : 쿄갤러리(동경), 2009년 3월 9-14일

◦ 전시세부내용 :

 ·전시작품 종류 : 다완(70점), 잔(40점), 주병(10점), 화병(12점), 헌다기(5점), 접시(4점), 다관(8점), 숙우(8점), 퇴수기(4점), 연지(4점), 항아리(3점), 귀잡이잔(8점), 등 약 170점 정도의 덤벙이 작품을 전시함.
 

  ·전시 중 진행계획 : 전시기간 중 차회(茶會)를 통한 작품의 우수성      집중홍보 (전시가 개최되는 각 지역에서 일반인들과 차인들을 대상으로    전시기간 중 보성덤벙이를 이용한 차회(오후 2시30분 - 4시30분,        2시간 소요)를 매일 개최하여 보성덤벙이를 전시 해당지역 차인들과        일반인들이 직접 사용해 볼 수 있는 쓰임 체험을 통해 보성덤벙이의      우수성을 널리 알릴 것임).
 -전시 오픈행사(오픈 당일 오후 6시)
 -다회(茶會) 개최(오픈일과 최종일을 제외한 4일간 오후 2시부터 4시    까지 2시간 동안)


송 기 진(三田, 二濟, 陶齋)
· 전남 벌교 生
· 1989년 도예 入門, 1997년 조선사발의 세계 入門
· 미술학석사 (논문「한국 전통 다완의 연구 -천한봉의 다완을 중심으로-」)

■ 개인전

· 제1회 석사학위 청구전(군산시민문화회관)        1998
· 제2회 송기진 도예전 (광주 궁전갤러리)          1999
      -한국전통다완 재현전-           
· 제3회 송기진 다완전 (서울 통인갤러리)          2000
      -전남 장흥 민수용 사발 재현전-
· 제4회 송기진 다완전 (목포문화예술회관)          2001
      -전남 보성 분인다완 재현 및 창작전-
· 제5회 송기진 다완전 (보성군립백민미술관 초대전) 2002
      -전남 보성 분인다완과 정호다완의 상관전-
· 제6회 고려다완 도예가 송기진 다완전 (일본 동경 쿄갤러리 초대전) 2004
      -보성분인 외 조선사발을 중심으로-
· 제7회 고려다완 도예가 송기진의 찻사발 한국, 일본 순회전
      (한국 범어사 성보박물관 특별전, 일본 동경 쿄갤러리 초대전)  2004
      -1부 : 일본국보가 된 조선사발 재현전, 2부 : 조선덤벙분청의 절대미 보성분인 재현전-
· 제8회 보성덤벙이 연구발표전(광주 서동갤러리 기획초대)  2006
· 제9회 세계적인 명품 찻사발 보성덤벙이 한국, 일본 순회전  2009
      (한국 : 갤러리서호(서울 인사동), 예송갤러리(대구), 일본 : 쿄갤러리(동경))

■ 수상경력

· 전국공모무등미술대전 우수상 2회 수상
· 전국공예품경진대회 최우수상 수상, 장려상 수상
· 국제차도구디자인공모전 특별상 수상 외 다수

■ 초대전

· 주일한국대사관 한국문화원 [韓,日 작도교류 초대전]  2003(일본 동경)
· 韓․日 전통공예품 공동전시회 초대전  2004(일본)
· 주불한국대사관 한국문화원 초대전  2004(프랑스 파리)
· Italy Karara  museum 초대전 2004(이탈리아)
· 한국, 일본 도예 교류 초대전 2004(일본 동경) 외 다수

■ 심사

· 광주광역시 기능경기대회 심사위원 역임
· 갑오동학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 대외활동

· 무주 환경 도자․조각 심포지엄 자원 봉사  1994
· 무주 도예 캠프 자원 봉사  1995
· 동계 U대회 기념 한국의 흙․불전 자원봉사  1996
· 한․일 도예대학 참여작가 Support  1998
· 중국경덕진도자대학, 한국남도대학 중국 현지 워크샵 참가  2000
· 제1회 전통옹기 문화축제 행사준비위원장 역임  2000
· 제2회 전통옹기 문화축제 시설지원 진행위원장 역임  2001
· 전라남도 문예진흥기금지원사업 선정 [전남 보성 보성분청사기 재현 연구사업] 2003
· 여수국제청소년축제 전통문화체험 워크샵 2003
· 교육부재정지원사업 도예 교육용 인터넷동영상제작연구 참여 2003
· 전라남도 문예진흥기금 지원대상 선정 [한국전통문화를 이용한 명상체험프로그램 개발] 2004
· 한국문화예술진흥원 2004 신진예술가 선정 [송기진의 일본국보가 된 조선사발 연구] 2004
· 진포도예가회 회장 역임 2004-2005
· 전라남도 문예진흥기금 지원대상 선정[한국,일본 전통찻사발도예가 국제교류 2인전] 2005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진흥기금 지원사업 선정[일본국보와 문화재가 된 조선사발에 우리이름    찾아주기 조사연구]  2006
· 보성 분청찻사발의 재현 및 확산을 위한 한,일 심포지엄(보성군)  2007
· 문화관광부 지방대활용컨설팅공모사업 선정[세계적인 명품 보성분청찻사발의 복원 및 확산    에 대한 컨설팅]  2007
· 보성 정흥리, 도촌리 분청사기요지 지표조사(보성군,남도문화재연구원)  2007
· 세계적인 명품 차도구 보성덤벙이 재현사업(보성군)  2007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진흥기금 지원사업 선정 2008
· 세계적인 명품 찻사발 보성덤벙이 한국,일본 순회전 지원사업(보성군) 2009

■ 교육경력

· 전남도립장흥대학 도자기공예과 행정조교 역임  1999-2001
· 전남도립장흥대학 평생교육원 생활도예반, 동,하계특강 강사역임  2000-2002
· 국립군산대학교, 예원대학교, 남도대학 강사역임  2002-2003
· 조선대학교 사회교육원 생활도자기 담당교수 역임  2003
· 성화대학 겸임교수 역임 2007-2008

■ 현

· 보성요(寶城窯) 대표, 보성다완연구소(寶城茶盌硏究所) 소장

■ 연락처

· 우 546-873) 전남 보성군 회천면 영천리 153-1
· ☎ 061) 853-0158, 016-602-1387






보성덤벙이(일본명 宝城粉引, 독음 호조고비끼) 小考

 보성덤벙이는 14세기 말엽부터 17세기 중엽까지 보성에서 제작된 백토덤벙분장사발을 말합니다. “덤벙이”란 기물을 제작한 후 기물을 백토물에 담구거나 기물에 백토물을 부어서 장식하는 분청자의 한 장식기법으로 일본에서는 고비끼(粉引)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덤벙이의 장식기법은 중국 당나라 시대(7세기-10세기) 당삼채도자기의 장식기법인 분채(粉彩)가 한반도 서해안 남부지역에 유입되면서 전해진 것으로 보이며, 지역적으로 점토에 철분의 함유량이 매우 많은 호남지방에서 흰색 면의 도자기를 얻기 위해 분채기법을 적극 수용해, 가장 한국적인 도자기라 할 수 있는 분청자(고려말-조선중기에 대량 제작)로 발전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그 근거로 古現 조기정 선생님께서 연구, 집필하신 綠靑磁小考를 살펴보면, 해남의 녹청자(제작시기10세기-14세기) 도요지군에서 발견된  “백회문(白繪紋)녹청자“와 ”철분채장박지문녹청자“에 쓰인 장식기법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미 이 때 분장기법과 박지기법이 쓰였다는 걸 알 수 있고, 이 기법들은 분청자를 제작하는 일반적인 장식기법들로 해남의 녹청자 문화가 분청자기법의 시초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따라서 한반도의 덤벙이기법은 10세기에 유입되어 6세기 정도를 거쳐 토착화 된 후, 고려말, 조선 초기에 들어서 이 땅의 서민적 기질에 맞는 최고의 장식기술인 자유로운 분청자 기법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한국 분청자의 역사는 통일신라말엽-조선중기로 폭넓게 이해하는 것이 옳으며, 해남의 녹청자문화는 한국 분청자 문화의 효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에서 제작되었던 덤벙이그릇을 살펴보면 우리의 덤벙이와는 다르게 훨씬 더 두껍게 유약을 시유하여 유약의 성상이 청자에 더 가깝게 보여 지며, 우리나라의 녹청자와 비슷한 느낌의 청자류 덤벙이인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중국에서 주로 사용하는 덤벙이의 백토는 장석질이 다량 함유 된 백토를 주로 사용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카오린계를 주성분으로 하는 백토를 이용해 덤벙이를 주로 제작하였습니다.
 덤벙이는 제작기법에 있어서 일반 도자기에 비해 매우 고난위도의 장식기법과 더 많은 작업공정이 요구되어, 민수용 그릇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사그막의 가마주인이나 제작자의 입장에서 보면 제품의 경제성이 백자나 녹청자에 비해서 매우 떨어지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덤벙이는 이런 경제적 취약성이란 큰 문제를 안고 잠깐동안(약 30년에서 70년 정도의 기간)제작되었다가, 조선초엽에 들어 희고 깨끗하며 덤벙이보다는 만들어내기가 훨씬 손쉬운 민수용백자의 대유행으로 차츰 그 명맥을 잃어 간 것으로 보입니다.
  전남의 각 지역에서 고루 제작되었던 덤벙이는, 그 중에서도 특히 ‘전남 보성의 보성요(宝城窯)와 무안의 무안요(務安窯)에서 대량으로 제작되었다’는 내용이 일제 강점기 때 일본학자들에 의해 연구 조사된 조선사기 관련 문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성덤벙이와 무안덤벙이의 외형상 특징을 구분한다면 보성덤벙이는 기물의 전체 면에 백토를 두르고 있고, 무안덤벙이는 기물의 내부 전체 면과 외부의 상부에만 백토가 주로 둘러져 있는 것을 큰 특징으로 합니다.
 덤벙이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지배계급의 다회(茶會)에서 말차(沫茶)를 마시는 찻사발로 사용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 하였으며, 당시 일본의 최고 권력자였던 풍신수길(토요토미 히데요시)도 덤벙이 찻사발의 소장인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의 차인들은 그 후로 수백 년 간 덤벙이를 고비끼(粉引)라 명명하면서 사용해오다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전남 보성(寶城)에서 대규모 고비끼 도요지를 발견하고 난 후 일본에서는 대명사처럼 호조고비끼(寶城粉引)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으며, 일본 내에서 크게 유행했던 조선사기 문화 중 일본국보가 된 조선사발류인 이도(井戶)와 덤벙이를 대표하는 호조고비끼(寶城粉引)가 양 축을 이루며 현재까지 조선사기의 위대한 명성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특히 보성덤벙이는 최고의 다완(茶碗 ,찻사발)과 민예자기로 일본과 국내의 골동품상들과 차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현재 보성덤벙이 진품 잔(盞) 하나에 가치가 2천만 원에서 3천만 원 정도의 시세가 형성되어 있고, 독특한 디자인을 갖춘 잔 같은 경우는 대개 1억 원 정도에 거래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 말차를 마시는 찻사발로 사용되는 보성덤벙이 중 족보를 가지고 있는 명품으로 알려진 다완들의 가격은 수십 억 에서 수백억 원을 호가한다는 사실이 보성덤벙이의 우수성을 일반적으로 인정해주는 결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보성덤벙이 도요지는 득량면 도촌리에 위치해 있는데 윗사그점골과 아랫사그점골, 그리고 앞의 두 요지군 보다 시기가 조금 앞선 정흥리 개산도요지 등 세 곳의 덤벙이 도요지가 반경 2km안에 모두 모여 있는 것이 큰 특징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랫사그점골은 현재 분포된 덤벙이 편들과 가마의 요벽, 지형의 형세 등을 기준으로 분석해 볼 때 가마의 기수가 최소 3기 이상으로 추정되지만, 일제 강점기 때 신작로(新作路)를 만든다는 명분으로 크게 훼손 되고 현재는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윗사그점골 또한 두 산이 맞대어져 형성된 골짜기를 중심으로 하여 양쪽으로 넓게 퍼져서 가마가 분포되어 최소 3기 이상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이 되나 1984년 도촌저수지 공사로 인해 대부분이 파괴되고 현재는 골짜기 부분 외에는 거의 남아있지 않고, 여기 저기 떨어져 있는 덤벙이편이나 가마의 요벽 등으로 규모를 짐작해야만 하는 실정입니다. 또한 인근의 비봉도요지외 쾌상리도요지,영등도요지 등도 덤벙이관련 가마가 운영되었던 흔적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다완(茶盌) 공부는 지금껏 내가 살아온 세계와는 전혀 다른 소위 도(道)의 세계 ...
 
 1989년에 처음 도예에 입문하면서 한 3 년 동안은 죽어라고 물레를 통해 그릇이나 항아리 만드는 것에 매달렸지만 물레에서 나올 수 있는 표현의 한계에 실망감을 느끼고, 점토로 더 많은 표현을 하기위해서 직접 점토를 만들어가며 도자조각(陶磁彫刻)이라는 도자조형공부를 5년 정도 하였습니다.
 그 후 이 정도면 도자기의 성형 및 재료, 표현기법적인 측면, 가마 소성방법, 등의 노하우와 부족한 작품이지만 어느 정도는 철학부분도 확보되었다 싶었을 때, 내 인생에 좀 더 가치 있는 작업을 하기위해 새로운 작업방향을 정하던 중 다완(茶盌)을 만나게 되어 그 길로 다완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대학원 논문으로 도천 천한봉 선생님의 한국전통찻사발 제작방식과 심미적인 측면을 연구한 것을 계기로 다완공부를 혼자서도 공부 할 수 있겠다 싶어, 먼저 교본대로 직접 자연에서 재료를 구할 수 있는 눈을 기르고, 천연재료를 수비하여 작업에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내는 기법을 연마하였고, 조선사발 도요지를 찾아다니며 도요지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내는 공부와, 도요지 주변에 널려진 사금파리를 수집하여 고려와 조선의 선배님들께서 만드셨던 그릇들의 재료적인 특성을 연구하여 그 사발들을 재현하는 노력들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작업진행에 있어서 문제점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다완공부를 시작할 때 ‘과거 물레공부를 한참 할 때 한 번에 20-30kg의 항아리도 쉽게 만들어냈었고, 점토만을 이용해 3m 높이의 조형성이 풍부한 도자조각 작품도 어렵지 않게 만들어낼 수 있는 뛰어난 기능이 나에겐 있다’라는 큰 자부심을 가지고 시작하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줌 크기도 되지 않는 다완 이었기에 ‘이런 건 식은 죽 먹기다’라며 웃으면서 시작했지만, 다완은 제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호락호락한 분야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다완 공부는 명품다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전통적인 기능 습득도 큰 문제였지만, 다완의 뒤에는 다도(茶道)라는 무소유의 절대 철학이 더 큰 문제로 버티고 있었습니다. 과거의 작업에도 철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세계는 지금껏 내가 살아온 세계와는 전혀 다른 소위 도(道)의 세계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렇다고 낙심만 하고 있을 수는 없어서‘옛날 조선(朝鮮)의 선배님들이 어디 절에서 도 닦으면서 사발 만드셨겠느냐’ 싶어서 무작정 그릇들을 만들어 보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능력으로는 도는 제쳐놓고라도 먼저 전통적인 방식으로 다완을 성형할 수 있는 기본적인 성형기능조차 되지 못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공부해내기 위한 공부 방법이 필요했고, 그래서 나름대로 나만의 작업방식을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단한 건 아니고 그저 나에게 맞는 방법이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말씀드리면, 먼저 작업의 목표를 정하는데, 목표는 다완을 만들려고 하는 모든 도예가들의 꿈이라고 여기는 일본국보가 된 조선사발을 재현하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다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일본국보가 된 조선사발에서 내가 무엇을 느낄 수 있는가를 알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몇 달 동안 그 사발을 바라만 봤고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왜 일본 사람들은 이 사발을 국보로 만들었을까?” “대체 이 사발에는 어떤 매력이 있는 걸까?” “내가 이 사발에서 느낄 수 있는 영감은 과연 무엇인가?”
 한 참후에 일본국보가 된 조선사발에서 제가 느꼈던 것은 “자유”였습니다. 그래서 저 사발보다 더 낳은 사발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저 사발과 똑 같은 형태를 갖춘 사발을 만들려 할 것이 아니라 먼저 내가 저 사발보다 더 자유로운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더 낳은 사발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왜냐하면 그릇은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생각과 심성을 그대로 나타내기에 내 마음이 도를 통한 도인(道人)처럼 평온하지 못하면 조선의 선배 사기장들이 행하셨던 “자연을 닮은 절대 미학의 경지”는 도저히 나올 수 가 없다는 것이 조선사발 재현에 대한 저의 기본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명품다완을 얻기 위해서는 그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능, 볼 수 있는 안목, 사용 할 수 있는 지식, 품을 수 있는 덕, 만족할 수 있는 도(道)를 갖추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러기위해서는 그 모든 것의 첫 번째가 마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능이야 어차피 시간가면 어느 정도는 얻어지는 것이지만, 사람의 심성이나 마음은 웬만해서는 변화가 어려운 것이라, 다완의 형식을 쫓는 일보다 먼저 마음을 닦는 일을 택하였다고 하면 쉽게 설명이 될 것 같습니다.
 또한, 다완의 형식을 정한 일본차인들 자체도 그 약속사항에 밑바탕을 일본국보가 된 조선사발을 관찰하며 발견된 것들을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정해놓은 약속사항을 지켜가면서 다완을 하는 것 보다, 조선사발을 만들어냈던 이 땅의 자부심을 안고 차라리 그 사발을 만들어 냈던 때의 감성과 기능으로 돌아간다면, 현존하고 있는 조선사발들 보다 오히려 더 낳은 사발들이 나올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다완을 만들기 위해서 무작정 물레질을 하여 기능을 끌어 올리려 할 것이 아니고, 물레질을 통해서 얻어지는 사발의 형태를 보며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마음공부를 먼저 하는 것이 옳다’라는 생각으로, 그저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때로는 그저 내손이 가는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진정한 편안함을 담은 그릇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그런 방식으로 먼저 마음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으로 만든 다완은 다완의 형식을 찾아볼 수 없는, 저의 마음만이 담긴 저만의 다완이라고 해야만 설명이 가능한, 중국음식점 면기보다 더 큰 크기의 사발들이었습니다.  용감하게도 이것 들을 가지고 첫 개인전인 석사학위 청구전을 하게 되었는데, 어디에서든 다완을 한 번만이라도 접해본 사람들이라면 그 때 제가 작업해 놓은 것을 보고 틀림없이 ‘이놈 아주 웃기는 놈 이구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음공부 중 재미있는 일화로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작품전을 했을 때였는데, 저의 전시도록을 우연히 접하고 작품을 구입하기 위해 전시장을 찾은 일본 다인(茶人)이 있었는데, 도록에 나온 작품 중 한 작품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그 작품을 구입하려고 왔다라고 하시면서 그 작품을 보여주길 원하셨고, 그래서 작품을 보여드렸더니 얼굴에 놀란 표정이 역력해지면서 의아해했었고, 저는 나름대로 짐작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큐레이터를 통해 불편한 점을 물었습니다.
  그 분의 답은 도록으로는 그릇의 내부가 보이지 않았기에 다완의 외관만 보고 왔는데, 그런데 막상 다완의 내부를 보니 진하게 손자국이 나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것입니다. 갤러리 큐레이터가 그 상황을 매우 당황스러워했고, 전 그 작품에 대해서 일본차인분과 큐레이터에게 이해가 되도록 설명을 하는데 시간을 할애해야만 했습니다.
  일본차인이 구하려했던 그 다완을 작업할 때의 저의 마음은 물레질을 할 때 사발내부에 물레가 돌아가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나선형의 손자국을 선명하고 진하게 사발 내부에 한 번 만들어내고 싶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표현은 다완의 형식에 크게 맞지 않는 것이지만, 그 순간 저는 이러한 생각을 한 저의 마음과 작업행위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무작위적인 행위라 생각했고, 이러한 마음이 다완에 표현되어진 것에 대하여 나의 진실한 자유의지가 들어 간 것이라 판단해 매우 큰 만족감을 느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 다완이 작가의 진실한 마음을 표현한 다완이기에 오히려 손자국이 없는 다완들 보다 훨씬 더 진실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차인들의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이었기에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심적인 고통의 시간을 어느 정도 보내야 했습니다. 고통의 시간들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서야 다완 내부에 손자국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그 마음자체도 진정한 자연스러움이 아닌 단지 작가의 욕심에 의한 인위적인 것이란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다완의 형식 하나, 하나를 교본에도 없는 엉뚱한 방식으로 풀어나가니 시간이 갈 수 록 점점 더 생활은 궁핍해졌으며 작업하는 자체가 엄청나게 큰 현실적 고통으로 다가왔고, 다완공부를 계속 해야만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기로에 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정말 큰 위기 때마다 하늘에 도움으로 정부의 문예진흥기금이나 아니면 기연으로 인해 만난 귀인(貴人)들의 도움으로 그 고비들을 잘도 넘겨 갔습니다.
 제가 작업하고 있는 보성요(寶城窯)는 보다 전문적인 전통 다완작업을 하기위해 보성 녹차밭 근처에 만든 것으로, 장작가마를 직접 묻고 소성 방법 자체도 전통식으로 하는 등 다완 만드는 방식 한 가지 한 가지를 모두 전통재래식 방법으로 공부해나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요장을 시작한지 1년 만에, 같이 시작했던 사람들이 배고픔이란 현실에 파고에 밀려 모두 떠나갔고 요장에는 혼자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매나 술에 장사가 없듯이 배고픔에도 장사가 없는 것이 현실인지라, 사발을 만들면 작품이 좋든 안 좋든 어떻게든 팔아서 돈을 만들어야 작업진행을 계속 할 수 있는데 그 때는 그 짓이 그렇게도 싫었습니다.
 더 낳은 작업을 위해서는 그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던 애절한 순수성은 여지없이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다가와 사람들 사이의 관계까지도 소원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어찌되었든 계속되는 공부를 위해서는 가마를 돌려야만했는데, 처음에는 대학의 도예과 학생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장작가마 소성작업을 같이 했지만, 그 것도 한 두 번이지 한 달에 두 세 번씩 불질을 할 때가 많은지라 잘 따르던 학생들마저도 넌더리를 내며 저를 피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혼자서 장작가마를 소성하는 방법이었는데, 이 방법이 생기고 나니 작년에는 소성횟수가 아마 22번인가 될 정도로 마음껏 불질을 해봤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미쳤다 싶습니다.
  서슬 퍼런 칼날 같던 사발에 대한 나의 의지(意志)들도 가마 안에서 타서 사라져버리는 나무들처럼 다 타고 없어져 기진맥진한 상황이 되었을 때, ‘사고(思考)를 통해 사발에 뭔가를 이루려는 생각자체를 버리자’라는 자성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소중해하던 다완 작업에 대해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물레질을 하고, 굽을 깍고, 유약을 바르고, 가마에 구워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것들이 일본의 차인들이 좋아하는 다완이 되어 있었습니다.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계시는 조용헌 교수님의 강연 중 “思之思之鬼神通知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귀신과도 통한다‘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는데, 작업 간에 문득 문득 조선시대 선배님들을 생각하면 ’그 분들이 이런 생각을 하시면서 이 작업을 하셨겠구나‘하고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같고, 오백여년 전 조선사발들을 너무나 아꼈던 센노리큐 선생의 마음도 아주 조금은 느낄 수 있는 순간들이 오는 것 같기도 합니다.


 
왜 보성에서 그 좋은 호조고비끼를 안하시고 이도차왕을 하십니까?

 몇 해 전에 일본국보가 된 조선사발을 재현하기 위해 미친 듯이 작업을 하다가, 연구에 대한 발표를 하기 전에 작품에 대해서 고견을 구하고자 문경요(聞慶窯)에 도천(陶泉) 천한봉 선생님을 찾아 뵌 적이 있습니다.
 도천 선생님께서는 말씀 중에 일본국보가 된 조선사발 보다는 보성덤벙이에 관해서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셨고, 전 그 영문을 몰랐었습니다. 물론 제가 보성지역에서 사발을 공부하고 있으니 보성에서는 보성그릇을 재현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선생님의 말씀 중에는 ‘왜 보성에서 그 좋은 호조고비끼를 안하시고 이도차왕을 하십니까?’가 말씀의 주요 요지였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말씀에 “다완을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도차왕을 재현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키자에몽오이도는 일본의 국보가 되어있으니 그 것부터 재현하고 지역의 그릇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리고 나왔지만, 왜 선생님께서 일본국보가 된 조선사발 보다 그저 한국의 한 지역에 한정된 보성덤벙이를 위주로 작업을 하라고 하시는지 그 때는 이해를 못했었습니다.
 그 다음해, 호남 지역에서 그릇을 빚는 사람으로서 먼저 지역의 큰 어른을 찾아뵙고 인사를 올리고 작업을 하는 것이 도리라 생각되어, 오늘날 우리나라 고려청자문화와 해남 녹청자문화를 다시금 일깨우신 광주광역시에 소재한 무등요(無等窯)에 고현(古現) 조기정 선생님께 인사를 올리려 찾아뵈었는데, 그런데 고현선생님께서도 ‘우리나라 도자기문화의 특성인 지역 사기문화의 우수성을 말씀하시는 중에 보성덤벙이(寶城粉引 일본명 호조고비끼)를 말씀하셨고, 보성덤벙이의 옛 사금파리들을 보여주시면서 그 것이 일본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호조고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덤벙이그릇에 차를 담아 마시면 그렇게도 좋으시다는 말씀도 함께...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저의 온 정신은 일본국보가 된 조선사발류에 더 몰려 있었기에  우리 지역 보성덤벙이의 우수성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제가 보성덤벙이를 재현하는 재현 방법으로는 조선시대 보성지역의 선배님들이 만드신 그릇들을 만들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전 보성덤벙이의 우수성을 몰랐었고, 우리나라에서 대가(大家)라고 알려진 선생님들을 뵐 때마다 들었던 보성덤벙이의 가치에 대해서 쉽게 공감하지 못했었습니다.
 올해 초 하동의 길성요(吉星窯)에 원당 길성 선생님께서 요장을 또 방문하셨는데, 선생님께서는 제가 보성에 처음 요장을 만들 때도 오셔서 저의 작업을 보시고는 “이것이 아냐”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번에 오셔서도 또 마찬가지로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미련스럽게 무턱대고 하지만 말고 당신의 요장에 찾아와서 한 번 당신의 작업들을 먼저 보고하라’라는 염려와 위안의 당부를 하셨습니다.
  4월 쯤 조선사발에 우리이름을 찾아주는 일 관계로 원당 선생님의 요장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원당 선생님께서는 ‘왜 보성에서 작업을 하면서 호조고비끼를 만들지 않고 이도차왕을 하는 것이냐’며 의아한 듯이 물으셨고, 난 다른 선생님들께 말씀드렸던 대로 똑같이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당 선생님께서는 당신께서 덤벙이에 관해서 작업하신 것 중에 찻물을 들여놓은 것을 보여 주시면서 ‘이것이 고비끼의 매력이다’라고 말씀을 하셨을 때 전 머리를 해머로 맞은 듯한 강한충격을 받았습니다. 또한 덤벙이의 장식수법에 있어서 지금껏 제가 해왔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을 지도해주셨는데, 한 눈에 보아도 ‘그 방법이 맞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통작가로서 작업방식을 그렇게 쉽게 말씀해주시기는 힘드셨을 텐데 이 기회를 빌어 원당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또 그날 오후에는 산청요의 소강(素崗) 민영기 선생님을 찾아뵙고 선생님의 작품을 견식 했는데 선생님의 작품 또한 저에게는 많은 영감을 덩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짧은 그날 하루의 경험들은 제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조선사발에 대한 궁금점들을 거의 해소시켜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 날의 그 사건은 저의 작업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원당 선생님께서는 보성의 흙으로 보성덤벙이를 한 번 멋지게 만들어보라고 하셨고, 그 길로 요장에 돌아온 저는 지금까지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의 덤벙이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만들어진 사발들에 찻물을 들여 봄으로 해서, 왜 그토록 여러 선생님들께서 보성의 덤벙이를 재현하라고 하셨는지를 깨닫게 되었고, 멀리 일본에서 보성까지 찾아온 여러 학자들이나 골동품 관계자들이 호조고비끼를 반드시 재현해달라고 말하는 그 심정을 그 때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엊그제 추석을 맞아 고현선생님을 다시 찾아뵙고 연구 중인 보성덤벙이를 보여드리며 지도를 요청했는데, 선생님께서는 당신께서 소장하고 계시는 덤벙이편들을 다시 한 번 가서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전하고는 달리 새로운 것이 보일 것이다’ 라며... .
 
 일본인들이 세계 최고의 민예자기 중 하나로 보성덤벙이(일본명 호조고비끼)를 말하고 있습니다. 
 조선사발이 일본 에도막부시대에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엄청난 가치로 거래된 사실과 다도의 와비철학을 빗대어 조선사발을 미화시키는 우수성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그릇에서 보여 지는 기능적, 심미적 측면에서만 바라본 보성덤벙이의 우수성으로 그 답을 하고 싶습니다.

첫째, 점토의 질에 다량의 철분함유로 차(茶)의 쓴 맛을 내는 성분인 탄닌을 중화시켜 차의 맛을 순하게 만들어내는 기능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둘째, 그릇의 외관은 백자와 다름이 없으나 그릇의 태토(胎土)는 흰색이 아닌 검은 색상을 띄고 있어 기물의 구조 자체가 매우 신비한 그릇이라 여겨집니다.

셋째, 보성덤벙이의 최고의 미(美)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마치 비오는 날 창호지에 빗물이 스며들듯이 기물의 표면에 찻물이 스며들어, 매번 차를 마실 때마다 스며든 찻물이 조화를 부리며 새로운 모양의 경치를 만들어내어 감상자에게 최고의 감상폭을 느끼게 합니다.

넷째, 가끔 보성덤벙이를 보면 백토를 기물에 분장함에 있어서 기물의 표면에 백토가 둘러지지 않은 부분들이 발생하는 ‘무지(無漬)현상’들이 가끔 보이는데, 이는 기벽의 흑색이나 갈색과 대비대어 색대비감과 자연스러운 곡선과 직선이 교차하는 선(線)과 면의 조화를 보여주어 덤벙이장식기법의 또 하나의 큰 매력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다섯째, 장가가마에서 구워진 그릇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붉은색 요변으로 일본말로는 흔히 ‘모미지’라고들 하는데 이것들이 자연스럽게 피어난 것을 보는 것이 또 하나의 화려한 감상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에 만들어진 다완들은 작가들이 인위적으로 사발에 요변을 내기 위해서 작업을 하다보니 자연스런 요변 보다는 자극적이고도 부담스러운 선명한 모양의 요변들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감상자의 눈을 흐리는 요소로서 작품의 질을 떨어뜨리는 큰 요소 중의 하나로 작용합니다.

 위와 같은 특징 중 특히 세 번 째와 네 번 째에서 설명하고 있는 덤벙이의 미는 그릇 하나 하나 마다 모두 다른 모양의 찻물형상과 무지현상의 형태를 갖추고 있어, 덤벙이그릇 저마다의 생명력과 고유의 세계를 유지하고 가꾸어나가는데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